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육의 전투가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3] 기진맥진... 그러나 또 다시 투입 명령

등록 2006.09.24 11:28수정 2006.09.2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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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귀국 10년간 가슴 졸이는 악몽


40여 년 전 중위시절 월남 전투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은 그 후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방카(벙커) 밖으로 총을 겨누며 고지를 지키고 있는데 적들은 개미 때처럼 기어 올라온다. 적이 공격해 오고 있다고 소리소리 질러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나 혼자 남아 있다. 뒷걸음질쳐 도망치지만 적은 계속 쫓아 올라 온다.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 총을 쏘아도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적들은 눈알을 부라리며 괴성을 지르며 계속해서 기어 올라온다. 아무리 발버둥쳐 소리 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미칠 지경이다. 빨리 도망을 가야 하는데 발마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월남에서 귀국 후 적어도 10여 년 가까이 거의 매일 밤 가슴 졸이는 악몽에 시달렸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내의를 갈아입을 때가 많았다. 아내는 내가 한밤중에 갑자기 몸을 뒤틀며 소리 지르는 것이 너무 무섭고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장교로 참전했던 나도 이러할진대, 병사출신들은 어떻겠는가? 참전자들이라 해도 대대본부 이상 급에서 그리고 소총중대가 아닌 부대에서 근무하였던 장병들과는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소총중대 요원으로 참전했던 분들에게는 특별한 대책의 배려가 필요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타나는 부상이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신의학적 정밀 검사와 적절한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겉으로 직접 드러나는 질병인 고엽제 문제조차도 지난날 독재정권은 얼마나 무심하고 미봉적이었던가? 특히 사병출신들의 이런 문제에 대해 한 가닥의 관심도 없었다. 이것은 꼭 재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관심의 문제다. 조국의 부름 따라 목숨 바쳐 자기를 희생할 각오로 뛰었건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국가란 국민에게 어떤 의미이겠는가.


빼앗은 적군 총 한 자루 = 무공 훈장 한 개

맹호 5호 작전이 개시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제1소대장이었던 서용원 소위가 전날 적이 설치해 놓은 대침에 발을 찔려 부상당했기 때문에 내가 갑자기 소대장 직책을 맡게 되었다. 월남전에서 부 중대장은 차라리 부 소대장이라 불러야 옳았을 것이다. 후방 기지는 중대 선임하사가 관장했고 부 중대장은 중대장을 따라 다니다가 소대장 유고 시의 대타 역할이 주 임무였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위험한 직책이었다.


제 2,3소대는 주변 지역을 정찰 중에 푸캇산 쪽으로 뛰어 도망가는 몇 명의 적을 발견하였다. 소대원들은 지체 없이 적의 뒤쫓았다. 당시 우리 병사들은 베트콩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 무기나 병참지원, 훈련정도, 체력 등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대원들은 앞다투어서 적을 추격했다. 총 한 자루를 노획해오면 인헌 무공훈장 한 개를 준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이 들고서 뛰는 총 자루가 병사들의 눈에는 임자 없는 훈장으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뒤쫓던 소대가 좁은 계곡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양쪽 산기슭에서 기관총 사격이 불을 뿜어댔다. 베트콩의 전형적인 유인작전에 빠져든 것이다. 퇴로가 적의 화망(火網)에 의해 차단되었다. 짙은 밀림 속이라 총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대원들은 혼비백산 흩어지며 퇴각하기 시작했다. 사상자가 속출했다. 전사한 병사들 중 몇 구의 시체는 운반해 오지도 못했다. M79발사기 사수의 시체도 발사기와 함께 그대로 둔 채 가까스로 철수했다. 적을 너무 얕잡아 본 무모한 추격으로 소대원들의 귀한 생명을 잃었다. 몇 명이나 사상 당했는지, 끌고 오지 못한 시체는 누구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인원 점검을 위한 점호를 했다. 누가 전사했고 실종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숨가쁜 순간이었다. 여태껏 군대생활 하면서 점호 시 인원 점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산자와 죽은 자를 확인하는 점검이었다.

"월남에서 죽을 필요없다"라고 하더니

사단 사령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연대장 대대장이 헬기로 날아와서 노발대발 화만 내며 야단을 쳤다. 우리는 죄인들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축 늘어져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적으로부터, 윗사람들로부터 시달려 우리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진맥진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높은 분들은 우리 중대원들의 입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대대장과 참모들은 우리 중대 때문에 점수 깎인 것만 분통이 터진다는 듯 눈을 흘겼다. 저런 사람들을 믿고 어떻게 전쟁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윗사람들이란 좋은 일은 자기들끼리 독차지하고 궂은일에는 아랫사람들의 책임만 물어 질책하던 본국에서의 꼬락서니 그대로였다. 따뜻한 위로의 말이나 눈길은 누구도 주지 않았다. 참으로 야속했다.

'월남에서 죽을 필요 없다'는 말은 인기를 얻기 위한 말뿐이었고 부하들을 죽음의 길로 모는 참으로 무모한 결정을 거리낌없이 내렸다. 하루 종일 시달리며 큰 전투 손실을 입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우리 중대를 재정비할 여유도 주지 않고 야음을 타 정글 지대 능선을 따라 산악 행군하여 적 지역에 깊숙이 침투, 두고 온 전우의 시체를 회수해 오라는 것이다. 지휘관들의 자존심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위험한 작전을 부하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그대로 강행했다.

당연히 우리 중대와 임무 교대해 주어야 할 예비중대가 있음에도 계속 대대본부를 지키도록 그대로 두어 자기 주변은 철옹성을 쌓아놓고 기진맥진해 있는 우리 중대를 다시 투입시켰다. 전술원칙에도 어긋나는 짓이었다. 우리는 밤새도록 숨을 죽이며 일렬종대로 정글을 뚫고 해치며 적 후방 지역에 접근했다.

조심조심 촉각을 세워 발자국 소리를 죽여 이동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벌을 누비던 우리들의 선배님들이 바로 이러한 역경의 전투를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육의 전투가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먼동이 트고 있었다. 여기 저기 집들에서는 아침을 짓는 연기가 긴 줄을 그으며 솟아오르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H시간을 맞추기 위해 산등성이에 숨어서 한참을 기다렸다. 날이 환하게 밝아왔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음이 내려가 보였다. 환한 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움직이고 있는 송아지들도 보였다. 우리의 농촌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참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면 이곳에서 살육의 전투가 벌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저들의 저 아름다운 평화를 깨뜨려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번듯번듯 스쳐 지나갔다. 우리의 조상들도 북쪽의 오랑캐들로부터 남쪽의 왜구들로부터 이런 식으로 침략 당하여 피를 흘리고 짓 밟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의 이런 저런 상념들은 공격 준비를 위해 퍼부어지는 포병의 집중사격의 폭음 진동과 함께 이내 사라졌다. 포탄을 맞으며 피하여 도망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멀리 내려다 보였다. 마치 지진과 산불을 피해 달아나는 작은 짐승들 같았다.

공격개시 명령에 따라 우리는 단숨에 들판까지 내려갔다. 적의 저항은 없었다. 두고 온 우리 병사들의 시신은 철모와 군화 등을 벗겨갔을 뿐 그대로 있었다. 나는 중대본부 요원들과 함께 시체를 헬기에 실어 옮기는 책임을 맡았다. 마지막 시체를 싣기 위해 헬기가 착지하는 순간 갑자기 적의 집중적인 기습사격이 가해졌다. 시체 한 구는 미처 싣지 못하고 헬기는 그냥 날아가 버렸다.

다급해진 중대장은 각 소대별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전날 혼쭐났던 소대원들은 소대별로 뿔뿔이 도망치듯 후퇴하느라 정신없었고 중대장도 그들에 섞여 가버렸다. 정글에 숨어 있던 적들은 계속 사격을 퍼붓는데 아무 엄호도 없이 시체를 끌고 나오려니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다.

시체 보며 "차라리 저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지옥 길에서 탈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것처럼 총탄 자국이 퍽! 퍽! 퍽! 줄 먼지를 품으며 매섭게 우리의 발자국 뒤를 쫓아오는데 이를 피하며 죽을 힘을 다해 우리는 시체를 끌고 뛰고 기다가 쓰러지다가 또 뛰며 극도로 기진맥진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도 겪어 봤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처럼 모질게 고통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처음에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적이 쏘거나 말거나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자포자기 뛰지도 않고 그냥 터벅터벅 걸었다.

병사들과 함께 축 처져서 무겁게 끌려오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그가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갈증이 극에 달하니 머리가 자주 핑 돌며 멍해졌다. 밭두렁에 널려 있는 참외를 보니 생명의 위험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발로 차 따내어 정신없이 먹어댔다. '군인정신' '육사정신' 이런 단어들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에게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 주어진 임무였기 때문에 그냥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절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며 한숨만 쉬고 있을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단다!" "맷돌로 갈아도 온 보리가 나온단다"라고 격려해 주시던 어머님의 말씀만 이따금 귓가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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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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