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4회

등록 2006.10.20 08:13수정 2006.10.2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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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군."


"무쇠로 만들어졌다는 자네도 그런 말을 할 줄을 아나? 그건 자네가 할 말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할 말이네."

함곡과 풍철한은 현무각 이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연무장 쪽은 환한 불빛이 하늘까지 치솟고 있어 밤새도록 켜놓을 모양이었다.

"나도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이네."

"피곤한 것은 당연하네. 하지만 쉽게 잠들 것 같지는 않군."

피곤하다고 해서 쉽게 잠이 드는 것은 아니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들기 어렵다. 더구나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잠들기 어렵다.


"누가 죽인 것 같은가?"

풍철한의 질문에 함곡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거야 자네 소관이 아닌가? 환시에 무엇이 보이던가? 그것을 알려주어야 보주의 말대로 추론을 해 나갈 수 있지 않은가?"

농과도 비슷한 말에 풍철한은 고개를 저었다.

"잘 보이지 않았네. 독룡아의 흔적이 충격적이어서 그런 것 같네. 하지만 자네나 나나 범인이 두 사람일 것이란 사실은 일치하지 않는가?"

"분명 두 사람이었나?"

"죽인 자는 한 명이지만 분명 옆에서 죽이는 것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네."

"언제 봐도 자네의 환시능력은 놀랍군."

"자네는 왜 두 명이라고 확신했나?"

"시녀의 고의를 먹인 자와 독룡아의 흔적을 남긴 자는 분명 다른 자라고 생각했네. 고의가 목에 걸려 질식해 죽는 상태에서 독룡조를 사용한 것이지. 하지만 그러려면 한 명이 그의 턱을 밀어올려 입을 다물게 한 상태에서, 즉 목이 훤히 드러나게 해놓고 독룡아의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단 말일세."

서교민의 목에 난 상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목에 난 반점은 고개가 꺾이자 타원형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흉수는 서교민이 죽을 때까지 그의 머리를 위로 밀어올린 상태였고, 죽고 난 다음에 역시 미끄러진 몸을 의자에 기대게 해 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한 흉수의 의도가 무어라 생각하나?"

"아까도 말하지 않았는가? 독룡아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뭔가 다른 것을 숨기고 싶었겠지."

"그래 그때 자네는 서당두에게 알아낼 비밀이 너무나 중요해서 독룡아로 시선을 끌었을 것이라 했네. 더구나 흉수가 서당두를 죽여야 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네. 그 이유를 무어라 생각하고 있는가?"

풍철한의 집요한 질문에 함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풍철한은 남들이 보기에 얼렁뚱땅 일을 처리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인물로 보겠지만 아주 집요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함곡은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마치 나를 신문하고 있는 것 같군."

"너무 답답해서 그러네. 뭔가 감은 오는데 그 연결고리가 너무 약하단 말일세. 살인은 우발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필연적이네.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알게 될 것 같다고 말했네. 나 역시 자네와 마찬가지로 감은 오는데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 사실 서당두의 죽음이 운중보와 관련 없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네."

"그렇다면 자네는 왜 앞으로 살인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 같다고 했는가?"

풍철한의 질문을 비켜가려던 함곡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풍철한은 세심한 데까지 놓치는 법이 없었다. 분명 그도 무언가 감을 잡기는 잡은 모양이었다.

"그건 아주 쉬운 추측이 아닌가? 운중보 내에서 운중보주를 비롯한 동정오우에 의해 이 중원에서 사라진 구룡의 무학이 발견되었네. 그렇다면 그 사실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서당두의 목에 남긴 독룡아의 흔적은 분명 경고하고 있는 것일세. 앞으로도 구룡의 무공은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지 않은가?"

"복수를 하려 한다면 오히려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어야 옳은 것 아닌가?"

"자네는 확실히 피곤한 모양이군. 운중보는 그동안 아주 평안했네. 지금 구룡의 흔적이 나타났다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할 것 같은가? 이 안에 분명 구룡의 무학을 익힌 자가 있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온 손님 중에서, 아니면 내부인 중에서 구룡의 무학을 익힌 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이제 믿을 사람은 없네. 지금까지 동문수학한 사형제 간이나 주위의 인물들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네."

"혼란에 빠지겠군."

"흉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겠지."

그래서 함곡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운중보에 머물고 있는 모든 인물들의 신상내력을 내일 오전까지 알려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위치까지 반드시 기재해서.

"하지만 흉수는 왜 서당두를 죽여야만 했을까? 흉수가 운중보를 노리고 있다면 그는 운중보의 인물도 아니었고, 별 관계가 있는 자도 아니었네."

"경첩형은 분명 우리에게 뭔가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네. 하지만 동창의 일이라면 우리가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네. 자네 역시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지 않은가?"

"별것 아니네. 나는 이곳에 오면서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그 일에 관여했네. 하지만 그것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바로 능효봉이란 작자와 내가 데리고 들어온 설중행에 관련된 일이네."

"그들도 분명 동창에 소속된 자들이겠지?"

"물론이네. 나는 여기에 들어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네. 분명 서당두와 관련된 자들이지. 아마 동창의 비밀조직에 있었던 것 같네. 별로 좋지 않은 일에 써먹는 그런 비밀조직 말이야."

"서당두를 죽이고 싶어했고 말이야."

이미 말하기로 작정한 터라 풍철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이지. 헌데 중요한 것은 혈간을 시해하는데 그들이 사용된 것이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지. 능효봉과 설중행이 살아남았다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두 사람이 그 정도로 고수인가 묻는 것일세."

"아직 모르겠네. 하지만 두 놈 모두 내 아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

능효봉이야 아까 주먹다짐을 하다 말았으니 느꼈을 터지만 설중행까지 그런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두 놈 모두 밉지가 않다는 말일세. 아주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사실 서당두를 죽인 흉수가 그 두 놈일 수가 있는데도 말이지. 두 놈 모두 서당두가 죽던 그 시각에 사라졌단 말일세."

풍철한이 혼란을 느꼈던 이유가 그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왠지 두 놈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감싸주고 싶은 마음. 조사를 하는 데 있어 사적인 감정은 버려야 할 첫 번째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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