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수사 외압설'은 조중동의 코미디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근거·사실·정황이 너무 엉성하다

등록 2006.10.31 08:28수정 2006.10.3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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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규 국정원장 사퇴 압력설이 골격을 갖춰가고 있다. 조각가는 조·중·동이다.

압력설의 출발은 추정이었다. 여권386의 '일심회' 연루 가능성과 함께 김승규 원장의 '돌연 사의표명' 소식이 전해지자 추리가 시작됐다. 국정원의 '일심회' 수사에 불만을 품은 여권386이 수사를 방해 또는 무마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고 이 과정에서 김승규 원장의 사퇴가 결정됐다는 얘기였다.

<조선>이 입열고 <동아>가 덧붙이고 <중앙>이 대답하고

a 김승규 국정원장(자료사진).

김승규 국정원장(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하지만 근거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가 어제(30일) 김승규 원장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터져나왔다. 국정원장 후임 인사와 관련해 "거론되는 일부 인사는 (정치권과) 코드를 맞출 우려 때문에 안 된다"고 대놓고 얘기했다.

김승규 원장의 코드 발언은 여권386의 압력 행사 의혹을 한층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압력 행사의 통로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동아일보>는 김만복 1차장을 내부 코드인사로 지목했다. 현재 거론되는 차기 국정원장 후보가 윤광웅 국방장관, 이종백 서울고검장, 김만복 국정원 1차장 3명인데 이중 내부 인사는 김만복 1차장 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초해 김승규 원장이 '김만복 불가'를 표명했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종석 사람' '전형적인 해바라기 스타일' 등등.

이제 한 가지 점만 풀면 된다. 그럼 김승규 원장과 국정원 내 코드인사 사이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대답은 <중앙일보>가 내놨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일심회' 멤버들에 대한 영장청구를 결정한 사람은 김승규 원장이다. 수사를 전담해온 대공수사라인을 중심으로 "좀 더 시간을 두고 동태를 면밀히 살피면서 관련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때 영장을 청구하자"는 주장을 내놨지만, 김승규 원장이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영장청구를 강행했다.

이유는 사회기강 해이 때문.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해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는데도 정치권 일각에선 미국 책임론이 나오고, 국민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개탄했다는 것이다.


대공수사라인이 이견 보였는데 외압은 해외담당이?

골격이 모두 세워졌으니 이제 다시 해부를 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 엉성하다. 코미디적인 요소도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건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다. 김승규 원장과 이견을 보인 주체는 대공수사라인이다. 하지만 김만복 1차장은 해외 담당이다. 대공수사라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런 그가 현 정권 핵심부와 코드를 맞춰 '일심회'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게 선뜻 납득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연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해외 담당이든 대공수사라인이든 어차피 국정원 식구들이다. 맘만 먹으면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고 치자.

다른 문제가 있다. 더 중요한 문제다. 대공수사라인이 김승규 원장과 이견을 보인 사안은 수사기법이다. 수사 지속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대공수사라인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 대공수사라인이 영장청구 시점을 늦추자고 주장한 이유는 관련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다. 당연한 생각이다.

김승규 원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의 양상이) 충격적"이라며 "추가 혐의자에 대해 추적 중"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랬다면 비밀수사는 불가피했다. 영장을 청구하는 순간 수사내용이 언론에 의해 공개될 것은 불문가지다. 영장청구는 곧 추가 혐의자에게 도주 또는 증거인멸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일심회' 사건 수사를 방해한 주체는 김승규 원장이다. "충격적인" 간첩활동을 한 추가 혐의자들에게 수사망을 피할 기회를 준 셈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성은 누가 해쳤나

김승규 원장은 <조선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와 내부개혁 지속을 위해 (내부인사 발탁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다."

비교해 보자. 김승규 원장도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내부개혁을 강조했다. 그럼 그의 영장청구 결정은 이 대명제에 부합하는가?

<중앙일보>가 전한 영장청구 이유를 토대로 해석하면 김승규 원장은 '일심회'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안보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사건을 서둘러 공개했다. 다른 범죄자도 아닌 간첩 혐의자를 추적중인데도 "우리가 너희를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었다.

안보 경각심이 이완됐다는 김승규 원장의 판단은 주관적이다. 80%에 가까운 국민이 북한의 핵실험을 규탄했다는 설문조사 결과와 겹쳐서 보면 더더욱 주관적이다. 그래서 그의 판단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정치적 판단을 갖고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이런 행위가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부응하는가? 아니다.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이 대명제가 되고 내부개혁이 그 실행방법이 된 이유는 자명하다.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맞춰 대공 사건을 조율해왔기 때문이다. 김승규 원장의 영장청구 결정도 크게 보면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근거도 사실도 정황도 엉성한 외압설

너무 일방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김승규 원장의 '육성'을 전한 곳은 <조선일보> 뿐이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육성'이 아니라 '전언'을 갖고 기사를 만들었다. 두 신문이 보도한 내용 가운데 잘못된 사실이 끼어있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실상을 오독할 여지도 있다.

따라서 김승규 원장 스스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쳤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기초한 가정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점은 분명히 확인된다. 외압설을 주되게 전하는 신문이 내세우는 근거·사실·정황이 너무 엉성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 신문이 외압설이란 큰 카테고리 아래에서 각기 다른 사실을 보도했지만, 각기 다른 사실을 따로 떼어놓고 봐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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