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군대는 군대도 아니다?

[내 젊음을 바친 군대 23] '내무생활에서 반말 없애기' 실험 논란

등록 2006.11.13 17:07수정 2006.11.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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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훈감 시절, 문화예술인 전방견학 행사 때 모습.

정훈감 시절, 문화예술인 전방견학 행사 때 모습.

"병장 계급장 달고도 일병에게 물심부름 시킬 수 없고 반말도 못하면 그게 무슨 놈의 군댄가? 그렇게 군기 빠진 군대 가지고 어떻게 전쟁할 수 있겠는가!"
"군대는 군대다워야 해! 옛날 우리가 군대 생활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 군대는 군대도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옛날 군대를 기준으로 볼 때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시대, 군사독재시대의 군대를 모본으로 한 잘못된 관점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짠 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이라 할 수 없듯이,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본질적인 특성을 잃어버리면 진정한 의미의 군대라 할 수 없다. 사고 날까 두려워 훈련을 적당히 시킨다든지, 심하게 요구하면 어떤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부하들의 나태한 임무수행도 온정적으로 적당히 덮어주고 방치한다면 군대가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든 신병 훈련과정에서는 입대 전에 품은 사고방식을 씻어내기 위해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사정없이 다그치고 몰아세운다. 딴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엄격한 규칙을 준수토록 강요하고 닦달한다.

미국 군대, 이스라엘 군대, 타이완 군대 모두 마찬가지다. 입대 후 처음 4주간은 '짐승 길들이기' 훈련처럼 무척 힘들고 고되다. 이는 군의 민주화 개혁과 관계없는 군 고유의 영역이다. 기초훈련과정을 마치고 일반 부대에 배치된 후에도 강한 훈련과 철저한 임무수행이 필요하다는 건 훈련병 시절에 배우고 익힌 원칙 그대로다.

신병 훈련은 엄하게, 자대배치 후 내무생활에선 자율성 보장


그러나 자대 배치 후 부대 내에서 하는 내무생활의 성격은 훈련소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 군인을 만드는 용광로 같은 그런 숨 막히는 긴장 과정이 제대할 때까지 계속된다면 장병들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내무생활 분위기는 명랑하고 여유 있어야 하며, 자유와 활력이 넘쳐야 한다. 개인의 자유시간은 공적 임무수행과는 별개로 확실히 보장되어야 한다. 속박과 억압적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야 한다. 이것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시행하는 정상적인 내무생활 모습이다.


언어생활의 수준과 분위기를 보면 그 조직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과거에 군 생활했던 분들은 내무반에서 쓰이는 언어가 얼마나 삭막하고 살벌하고 짜증스러웠는지 생각날 것이다. 상급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감정을 쏟아내는, 거칠고 경직된 단어들이 난무했다.

"자식들, 병신 같은 새끼들, 거지같은 놈들, 웃기는 놈들, 형편없는 놈들" 등 감옥소에서 밥그릇 수를 내세운 고참 죄수들이 사디스트적인 횡포를 부릴 때나 사용할 법한 용어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쓰였다.

군대에서 상하 동료 간에 사용되는 언어의 품격은 내무생활 분위기와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 등에서도 드러나듯, 남달리 정이 많은 우리 민족에게 말은 인간관계에서 정말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고참병 횡포 등 부하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든 문제들은 잘못된 언어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급자도 같은 군인일 뿐 노예가 아니다

내가 정훈감으로 재직할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주관해 사회 전문가들과 함께 군 내무생활 개혁에 관한 세미나를 연 적이 있다. 이 때 난 '내무생활 폐지에 관한 연구'라는 다소 충격적인 제목을 일부러 붙이고, 옛 일본 군대의 문화를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는 내무생활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 그 목적과 방법 등에 대한 기본개념부터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혁명적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유교적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사회의 조직 문화는 수직적 경직성이 지나치게 강하다. 이는 직장 상사, 학교 선배나 집안의 윗사람에게 꼭꼭 존댓말을 해야 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특히 일본 군대문화에 찌든 분들이 우리 군을 오랫동안 주도하다 보니, 군 내부에서 극단적으로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굳어져 부하의 인격무시, 고참병 횡포 등 고질적인 병폐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난 특정 부대를 시범 부대로 설정, 공적 지시나 명령이 아닌 일상적인 내무생활의 자유 시간에는 상하 동료 상호간에 반말(卑語)을 없애고 존칭어만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연구하자고 제안했다.

생각은 말로 나타나고 말은 행위로 연결된다. 언어문화를 획기적으로 개혁해 군대문화를 개혁하는 작업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어린 아이에게 존대어를 사용할 때 상호 인격적 존중감이 형성될 수 있듯이, 상호 존대어를 사용하면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성립돼 내무생활의 병폐가 많이 치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를 관철하는 데 가장 큰 난관은 계급과 군기의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일이었다. 상급자가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나, 어떤 일이라도 시켜도 하급자는 당연히 순응해야 한다는 의식이 일반화돼 있었다.

그러나 내무생활의 자유 시간 등 사적 영역에서는 사실상 계급이 의미가 없다. 부하에 대한 명령이나 지시는 공적인 업무에 한에서, 그리고 이를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직책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병사들 사이에서 계급이란 본래 분대장, 반장 등 직책에 임명하기 위한 자격요건이자 급여 등 대우의 수준을 정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군기는 군대의 생명'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적진을 향해 돌격명령을 내렸는데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군기란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에 관한 내용이며, 규칙을 위반했을 때 받는 벌칙의 엄정함을 의미한다.

군기가 해이해졌다는 건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로 한정해야 한다. 상관 앞에서 쩔쩔매지 않는다고 혹은 상급자가 시키는 사적인 심부름이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군기가 서 있지 않다고 하는 건 결코 옳지 않다.

내가 제안한 '내무생활에서 반말 없애기' 실험은 당시로선 너무나 파격적인 발상이라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 사회학에 조예가 깊은 서울대학교의 홍두승 박사는 이에 매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런 실험은 군대조직에서만 할 수 있다는 내 주장에 홍 박사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내무실 반말 없애기 = '군대 망칠 짓'?

최근 육군의 한 사단에서 이러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부대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고 여러 가지 바람직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군의 고위 간부출신 예비역 일부가 '군대 망칠 짓'이라고 호통 치는 바람에 실험은 중단됐다고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군대 개념이 바람직한 군대상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난 국군 발전의 가장 큰 장애요소가 바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영삼 정권은, 누가 국군 통수권자가 되건 이젠 군대 장악 자체는 걱정할 것 없다고 판단했는지 용감무쌍하게 하나회를 척결했다. 군대 개혁 방안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졌다.

한 번은 <내일신문>의 홍아무개 기자가 갑자기 찾아왔다. 군 개혁에 관한 특별 기사를 쓰기 위해 홍두승 박사에게 문의했더니 필자를 만나보라 하더라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난 신문, 잡지, TV 등에서 군 개혁 방향에 관해 다양한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개혁의 핵심 과제인 사관학교 훈육제도와 고급간부 평가 및 진급제도 개혁 등에 대해 역대 정부는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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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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