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 여행객숙소 입구에 걸려 있는 밥 말리 얼굴 그림김성호
라스타파리교에서 남자들이 머리를 길게 땋아서 내리는 레게머리(dreadlock)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레게음악(reggae music)이다. 지난 1968년부터 자메이카에서 발생한 새로운 레게음악의 내용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흑인들의 아픔, 아프리카의 단결과 독립 등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세상에서 부당하게 차별받는 자라면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 것. 바로 자유와 평등, 평화에 대한 외침이었다.
레게음악의 전설적 인물인 밥 말리(Bob Marley.1945~1981)의 사상적 밑거름은 바로 라스타파리교였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밥 말리는 'no, woman no cry(아니오, 여인이여. 눈물을 흘리지 마오)' 등의 노래를 통해 인간해방에 대한 희망을 아프리카 뿐 아니라 미국, 유럽, 남미 등 전세계로 전파했다. 그 역시 여느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숨졌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허름한 술집 등에서 흘러나오는 밥 말리의 레게음악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레게머리를 한 밥 말리 초상화도 에티오피아 뿐 아니라 케냐, 남아공, 마다가스카르 등 아프리카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남미에서 베레모를 쓴 군복차림의 체 게바라 초상화를 볼 수 있듯이.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6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샤세메네라는 도시에는 라스타파리교 추종자들의 공동체 마을이 있다. 현지인들은 공동체마을을 그냥 '자메이카'라고 부른다. 이들은 오늘도 레게머리에 레게음악을 들으면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부활과 복위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하일레 셀라시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일부 라스타파리교 추종자들에 의해 신격화되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별로인 것 같다. 우리가 조선 말기 고종 황제에 대해 별다른 향수가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난 1974년 좌파군부에 의해 "민중의 삶을 외면한 반(半)봉건적이고 권위주의 지배체제"라는 이유로 폐위된 셀라시에에 대한 평가는 친서방 성향의 현 정부에서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셀라시에 유해를 삼위일체교회로 안장할 때 현 정부는 "45년간 통치하면서 탄압과 잔학행위를 자행했다"며 이장행사에 국장의 지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장행사에 참여한 군중수도 예상했던 수십만 명이 아닌 수천 명에 그쳤다고 한다. 그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내가 탔던 택시의 운전사는 "하일레 셀라시에는 부자들만 좋아한다"고 잘라 말했다.
@BRI@지난 1974년 기아로 10만 명이 사망할 정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 셀라시에는 쫓겨났다. 광대한 토지를 가진 소수의 귀족과 고위관료가 상류층을 이루는 데 반해, 인구의 70%는 가난한 소작인으로 구성된 에티오피아 사회의 봉건적 모순이 깔려 있었다. 역시 대지주로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거운 소작료를 징수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가중시켰던 것이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회.
황제와 귀족, 정교회는 대다수의 노동자와 소작농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자신들의 배만 채움으로써 민심을 잃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근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그 독보적 지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고려시대 사원전의 횡포로 민중의 신뢰를 잃어버렸던 귀족화된 불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하일레 셀라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지나친 친기독교 편향의 정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인구의 절반이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이지만, 이슬람교도 역시 40%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사실상 국교로 여겼던 셀라시에 황제가 국민통합의 구심이 될 수는 없는 것. 더구나 셀라시에는 이야수 5세를, 이슬람교도를 우대했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내쫓은 당사자가 아닌가.
에티오피아는 다양한 인종간의 갈등과 함께 종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슬람교도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배려들을 펼치고 있다. 황제 체제의 제정을 폐지한 뒤 공화정으로 바꾼 신헌법에서는 아예 신앙의 자유를 명기했고, 아디스아바바의 볼레 국제공항 청사 안에는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예배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이유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우리나라 하고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아프리카 국가로는 유일하게 에티오피아군을 유엔군의 이름으로 파견했고, 1968년 5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데는 기독교 국가인데다 1935년 이탈리아의 점령 당시 영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되찾는 등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친서방국가들과의 전통적 우호적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은 현재 아디스아바바 외곽 구릉지대인 웨레다 및 케벨레 지역에 '한국촌(Korea Village)'을 형성해 어렵게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내전과 기아로 고통 받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대한 빚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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