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교사 시절 치른 상상 속 정년 퇴임식

귀하의 사랑 공간이 25% 남았습니다!

등록 2007.01.04 10:21수정 2007.01.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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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두 번째 날 아침이었다. 주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안방에 있는 휴대폰에서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밥을 먹다가 자리를 뜨기도 뭐해서 나중에 받을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불과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신호음이 다시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해보니 두 통 다 이태 전에 담임을 맡았던 제자 아이였다. 그런데 문자 내용이 이상했다.

'귀하의 저장 공간이 25% 남았습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RI@평소에도 머리 회전 속도가 느린 나는 저장 공간 어쩌고 하는 앞 문장도 제자 아이가 보낸 문자의 내용인줄만 알았다. 하긴 회사에서 보낸 안내 메시지와 아이가 보낸 문자가 함께 편집이 되어 있었으니 순간적으로 그런 착각을 할만도 했다. 어쨌거나 머리가 더디게 돌아가는 대신 상상력 하나는 못 말릴 정도로 풍부한 나는 문자를 보자마자 금세 이런 엉뚱한 상상에 빠져 들었다.

'나에 대한 기억이 25% 남았다는 말일까? 아니면 내가 아이를 25%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런데 녀석이 언제부터 이렇게 문학적이 됐지?'

이 정도면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민망하다. 아내에게 보여주며 문학적 어쩌고 하고 떠들어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나는 뒤늦게야 그 뜻을 알아채고 혼자서 허망하게 웃고 말았는데 막상 문자를 지우려니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문자를 보내온 아이들이 거지반 학교생활이 평탄하지 않았거나, 그로 인해 나를 힘들게 했던 아이들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 자리수 남은 정년

a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지난 가을 수련회 때 함께 산을 오른 아이가 힘이 드는지 고개를 파묻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지난 가을 수련회 때 함께 산을 오른 아이가 힘이 드는지 고개를 파묻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 안준철

그래도 어쩌랴? 저장 공간이 다 차버리면 아이들과의 소통이 아예 차단되고 말텐데. 그리고 문자를 지우는 것이지 내 기억 속에서 아이들을 지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치 누가 나를 추궁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문자를 지우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지우는 것이 너무 야박해서 문자의 내용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한 사람씩 지워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문자는 지우면 저장 공간이 다시 생기지만 지나간 시간들은 지운다고 다시 복구가 되지는 않겠지. 지금 나의 저장 공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아이들과의 사랑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25%쯤 남았을까?'


아마도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든 것은 해가 바뀌면서 나의 정년이 한 자리수로 남게 된 것과 상관이 있을 것도 같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나의 나이를 실감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벌써 정년을 생각할 때가 되다니? 하긴 나는 이미 정년 퇴임식을 치른 경험도 있다. 물론 상상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말이다.

교직 경력 채 3년이 되지 않은 팔팔하던 시절의 얘기다. 그때는 꿈에서조차 정년을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인데 나는 어쩌다가 상상 속에서나마 정년 퇴임식을 하게 된 것일까? 그 무렵 나는 학생들과 함께 지리산 학생 수련장에 있었다. 학생들이 수련회의 프로그램에 따라 유서를 쓰고 있는 동안 나는 수련장 뒤뜰을 거닐며 정년퇴임의 변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상상의 관중들까지 동원시켜놓고서 말이다.


'저는 오늘 정년을 마치고 정든 교단을 떠납니다. 교단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추억 속에서나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날 수 있을 뿐, 이 학교 공간에서는 더 이상 사랑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저는 학생들이 뛰놀고 공부하는 저 교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시간이 화살 같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제자들을 마음껏 사랑하십시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내 열변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하긴 나 말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모르면 몰라도 나는 그날 이후로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사랑의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던 것도 그날 나의 못 말리는 상상력이 벌인 해프닝 덕분임에 틀림이 없다.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것도.

나는 지금도 가끔 혼자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작년 한 해 나를 너무도 힘들게 했던 한 아이와도 퇴근길에 자주 대화를 나누곤 했다. 물론 아이는 없고 나 혼자서만 중얼거리는 그림자 대화였지만 말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를 수도 있지만 선생님들은 너희들을 혼내고 야단을 치는 순간에도 너희들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거야. 물론 미운 생각이 들 때도 있지. 하지만 그때뿐이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떻게 보여줄까? 그래 저 나무를 보자. 저 나무가 살아 있는 것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꾸만 철없이 하늘로 올라가려고만 하면 나무는 어떻게 될까? 죽고 말겠지. 그 결과가 너무 뻔하잖아. 그런데도 하늘로 올라가라고 그냥 놔두는 것이 사랑일까?'

a 댄스동아리 유토피아-무대에서 공연할 때보다 연습하는 모습이 더 진지하다.

댄스동아리 유토피아-무대에서 공연할 때보다 연습하는 모습이 더 진지하다. ⓒ 안준철

이런 식이니 가끔 길가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그런 상상의 대화를 통해서 얻는 점도 많다. 우선, 연습의 효과가 있다. 나도 모르게 스며든 아이에 대한 미움을 덜어낼 수 있다. 아무튼 앞으로도 이런 못 말리는 상상력이 시들지 않고 당분간 지속된다면 언젠가 내 휴대폰에서 이런 안내 메시지를 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귀하의 사랑 공간이 25%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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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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