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은 자전거, '예순'은 지져스?

어드로이트 칼리지 한국어 교실 이야기

등록 2007.01.14 19:44수정 2007.01.1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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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한국어를 배우는 영어권 학생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숫자이다.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나 되고 어떤 때에는 '하나 둘 셋 넷'을, 또 어떤 때에는 '일 이 삼 사'를 써야 하니 학생들로서는 정말 힘든 주제이다.

이런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필자의 한국어 수업에서는 필자가 직접 만든 숫자 노래들을 통해서 한국 숫자들을 공부한다. 같은 멜로디에 두 가지 종류의 숫자를 붙여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RI@그렇게 10까지 숫자를 익히고 나서는 '369 게임'을 하고 '손가락 게임'을 하곤 한다. 처음에는 어색한 몸 동작으로 '369 게임' 준비 동작을 하기도 하고 굵은 손가락들을 내면서 손가락 게임을 하기도 하면서 배운 한국 숫자들을 기억하려 애쓰지만, 점점 게임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숫자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게임에 이기려고 애쓰는 학생들을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또 전화번호도 서로 물어보고 전화로 전화번호를 불러줄 때에는 '1'을 '하나'로 읽기도 한다고 알려주곤 한다.

10까지의 숫자는 그래도 쉬운 편이다. '십일 십이 십삼 십사'는 '10+1 10+2' 등으로 가르치고 '이십 삼십 사십'은 '2x10 3x10 4x10' 등으로 가르치면서 은근히 한국 사람들이 수학을 잘 하는 이유도 이런 한국 숫자 구조에 있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열 스물 서른 마흔'이다.


어떤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쉽게 외울 수 있는 방법도 아니니 정말 학생들에게는 이보다 어려운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열 스물 서른 마흔' 노래를 만들어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이 넘은 유대봉씨는 쉰부터 아흔까지는 아주 힘들어 하신다.

a 필자의 산문집에 게재된 유대봉씨 사진. 여름학기 수료식에서 초급 1반 수료증을 받았다.

필자의 산문집에 게재된 유대봉씨 사진. 여름학기 수료식에서 초급 1반 수료증을 받았다. ⓒ 구은희

집에 가서 따로 공부하기 힘든 학생들의 실정을 감안해 필자는 무조건 수업 시간 내에 암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쉰, 예순, 일흔, 여든, 아흔'이 쉰이 넘어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백인 아저씨 유대봉씨에게는 버거운 모양이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열 스물 서른 마흔'을 세고 있는데 유대봉 씨가 '쉰'을 세야 할 때 다시 막히고 만다.


그때 야후에 근무하는 또 다른 백인 학생 이보명씨가 유대봉씨에게 '바이씨클'이라고 하면서 자전거 타는 동작으로 힌트를 준다. 처음에는 '자전거'와 '쉰'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었지만 나중에 '스윈'이라는 명품 자전거 브랜드가 있는 것을 알고서 이보명 씨의 재치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렇게 유대봉씨는 '쉰'을 암기할 수 있었다.

a 야후에 근무하는 이보명씨와 그의 가족.

야후에 근무하는 이보명씨와 그의 가족. ⓒ 구은희


그 다음 고개는 '예순'인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연상되는 것이 없었다. 그때 필자가 생각한 것이 '예수'라서 '예수'가 영어 '지져스'의 한국 발음이라고 이야기 해 주면서 그런데 60과 예수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때 유대봉씨가 '666'이라고 하면서 '예수'와 '예순'의 관계를 만들어냈다. 이제 '쉰'은 '자전거'와 '예순'은 '예수'로부터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 학생들은 1부터 100까지 순 한국 숫자나 한자 숫자 모두 셀 수 있고, 자신의 전화번호를 듣기 좋게 불러줄 수 있으며 고양이를 셀 때에는 '한 마리, 두 마리' 이렇게 셀 줄 알고 사람을 셀 때에는 '한 명, 두 명'이라고 셀 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도 힘들어 하는 우리 숫자를 한국식으로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한국 숫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필자의 산문집 '한국어 사세요!'에 나온 자신들의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 하는 사랑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돈도, 명예도 없는 일이지만 이 길을 택한 것이 아주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구은희 기자는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이자 교수, 시인입니다. 본 기사는 미국 로칼 신문 '코리아나뉴스'에도 송부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구은희 기자는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이자 교수, 시인입니다. 본 기사는 미국 로칼 신문 '코리아나뉴스'에도 송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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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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