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도다, 와서 술 한 잔 하자

<시 하나에 삶 하나 10> 서른 살의 겨울, 내 삶의 쓸쓸함을 함께 했던 섬, 오동도

등록 2007.02.23 21:39수정 2007.02.24 11:3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 김 현


섬에 한 번 가봐라, 그곳에
파도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 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 안도현의 '섬' -



@BRI@서른 살의 겨울, 배낭 하나 달랑 매고 집을 떠났다. 집이라야 나 혼자 지내는 자취방이니 누구한테 어디로 떠난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배낭 속엔 양말 두 켤레, 읽다 만 책 한 권, 윗옷 하나쯤 들어있었던 것 같다.

퀭한 바람에 가슴을 맡긴 서울역 대합실에서 난 망설였다. 목적지 없이 떠나온 길이라 행선지를 알리는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에 띈 글자 하나, 여수였다. 여수, 언제부턴가 가보고 싶었던 곳. 여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오동도라는 섬이 있다는 사실뿐 아무것도 없었다.

표를 끊고 열차에 몸을 실었지만 내 마음은 그저 쓸쓸했다고 할까. 시련을 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디에 마음 하나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풍경도 마음 따라가는지 아무것도 없는 빈 들녘, 눈으로 스치는 집들이 무척 스산해 보였다. 평택을 거쳐 대전 그리고 전주를 지나 여수에 도착. 여수에 도착할 즈음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작은 역 대합실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을 떠올리게 하는 중로 몇 사람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쏯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략>
-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


시인이 바라보던 역에는 톱밥 난로라도 있었지만 내가 내린 역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 역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그리움이 남아 떠나려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역문을 나서며 택시를 잡았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오동도란 섬에 가기 위해서다.


"어디 가십니까?"
"오동도요."
"네? 거긴 왜 갑니까?"
"그냥요."

그런 내 대답이 수상스러운지 택시 기사는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밤에 오동도엔 왜 가냐고 자꾸 물어댔다.

"거길 이 시간에 왜 가려고 합니까?"
"왜 가면 안 됩니까? 그걸 왜 자꾸 묻습니까?"
"아, 아뇨. 그, 그냥."

마지못해 출발하면서도 택시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날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아마 택시 기사는 내가 혹 자살을 하러 간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더구나 역에서 오동도에 가는 매표소까진 택시로 오 분도 안 걸렸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는 다 왔다며 날 내려주었다. 내려주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릴 떼지 않았다. 하지만 황당한 것은 나였다. 이리 가까우면 길이나 알려주지.

a 삶이란 게 피었다 지는 저 동백과 같은 것인가?

삶이란 게 피었다 지는 저 동백과 같은 것인가? ⓒ 김현

밤바다의 파도소리만 들려왔다. 인적은 뚝 끊겨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야 왜 택시기사가 왜 이곳에 가려 하냐고 자꾸 물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겨울의 밤에 오동도를 찾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다리 초입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밑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한 불빛 아래 흔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다낚시를 하는 사람 같았다. 밑으로 내려갈 엄두는 못 내고 위에서 소리쳤다.

"아저씨, 뭘 잡으시나요?"
"……"
"많이 잡으셨어요?"
"아, 네. 아나고 낚시를 하는데 잘 안 걸리네요."

몇 번의 물음에 낚시를 하던 아저씨가 겨우 대꾸를 한다. 새끼 몇 마리 건졌다며 어디 가냐고 물었다. 섬에 간다고 하자 그 아저씨 또한 '거긴 왜 가요?' 한다. 글쎄다. 내가 왜 이 밤중에 이곳 먼 곳까지 와서 섬에 가려고 하는지 몰랐다. 그냥 사는 게 답답했다고 할까. 아니면 내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에 허우적거리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왔다고 할까.

이런저런 자문자답을 하며 다리를 건넜다. 횟집 몇 개만 덩그러니 희미한 불빛을 밝혀 들고 낯선 객을 쳐다본다. 외로움이 오싹 몰려들자 부천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 이리 와라."
"어딘데?"
"여기 오동도."
"오동도가 어디야. 여수?"
"그래, 오동도 섬에 와 있다. 와서 술 한 잔 하자."
"인마, 너 미쳤냐. 이 밤중에 거긴 왜 가?
"그냥 왔다. 올 거야 안 올 거야?"

나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친구는 '미친놈'이라 하며 뭐라고 중얼댄다. 하기야 부천에서 여수까지가 어디라고 오겠는가. 오라고 한 사람이 미친놈이지.

전화를 끊고 섬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숲이 시커멓게 눈을 뜨고 쳐다본다. 그냥 길만 따라 걸었다. 파도가 쏴아 쏴아 자맥질하며 울어댔다. 겨울바람에 나무들은 '스삭'거렸고 내 발걸음 소리에 놀라 몇 번인가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숲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맥 빠진 내 삶이지만 되돌아서기가 싫었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뭔가 있겠지 하는 마음, 삶의 출구가 보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그냥 숲을 빠져나올 때까지 걸었다.

a 우리네 삶도 언젠가 저리 뜨거울 때가 있지....

우리네 삶도 언젠가 저리 뜨거울 때가 있지.... ⓒ 김현

무서웠던 파도소리도 나중엔 정답게 들렸다. 한참을 그 파도소리에 귀를 맡기고 나무 기둥에 손을 맡겼다. 낯섦도 걷다 보니 익숙함이 되어 있었다. 파도가 나에게 '그냥 그렇게 걸어. 걷다 보면 햇살이 비출 거야. 네가 원하는 햇살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숲을 빠져나와 아직 전등불을 켜놓고 객을 기다리는 횟집에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주인아저씨에게 술을 건네며 이런저런 몇 마딜 나누고 다시 왔던 길을 걸어왔다. 낚시를 하던 아저씨는 집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겨울 바닷바람이 차갑게 날 몰아붙였지만 그리 춥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동도 숲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내 텅 빈 마음은 뭔가 모를 무엇으로 채워진 것 같았다. 어둠이 아닌 밝음으로.

이후로, 여수의 오동도는 내가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새벽열차를 타고 현장체험을 갈 정도로 삶의 한 자락을 지켜주는 그리움의 섬이 되었다. 그리고 힘들고 지칠 때면 그때, 서른 살의 겨울에 찾던 오동도를 생각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너! 나! 따로 가지 말고 함께 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4. 4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5. 5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