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에 휘파람 분 아이가 있다면?

교실의 숲에서 휘파람을 부는 아이들, 그리고 악수 종례

등록 2007.03.17 10:57수정 2007.03.1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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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수업을 하고 있는데 교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내가 좀 들떠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겁도 없이 휘파람 소리를 낸 녀석의 그날 일진이 좋아서 그랬는지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청아한 새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연극 대사라도 외우듯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 우리 교실에 새가 한 마리 들어왔나 보네!"

@BRI@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두 마리의 새가 화음을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가 싱긋이 웃어 보이자 금세 한 마리가 더 합세하여 이내 삼중주가 되었다. 나도 질세라 입을 오므려 휘파람 소리를 내 보았다. 휘파람새 한 마리가 아이들 쪽으로 날아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는 잠시 교탁에 책을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새들을 다 날려보세요."

순간, 말을 잘했다 싶게 교실은 삽시간에 새떼가 날아와 앉은 숲이 되고 말았다. 내가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아이들도 환히 따라 웃었다. 사내 녀석들이 귀엽고 예뻤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자유의 냄새가 났다. 불과 몇 분, 아니 몇 초가 그렇게 흘러가고 이내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몇몇 떠드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 잠시 눈길을 주면 덩치 큰 녀석들이 순한 양처럼 자세를 바로 고쳤다. 그 중 한 녀석이 처음 휘파람을 분 아이가 아니었을까?

요즘 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참 즐겁고 행복하다. 굳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정년이 빨리 와버렸으면 좋겠다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동료교사들도 적지 않다. 사실 나도 여러 차례 그런 우울한 생각에 빠져 본 적이 있다. 그 아픔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아이들 속에서 행복한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 속에서 행복하다. 올해 들어 부쩍 행복한 기분이 자주 들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 삶에 어떤 놀랄만한 변화가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선의(善意)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랄까? 아이들을 믿고 사랑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숙명처럼 가슴에 아로새겨버렸다고나 할까?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을 궁리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행복해진 것 같다.


요즘 들어 나에게 변화가 생겼다면 그것은 내가 좀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반응속도가 사뭇 늦어진 것이다. 아이들에게 더디 화를 낸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 저주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 두 가지만 실천해도 아이들 문제로 속을 상하는 일이 적어진다. 나로 인해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금 정리해 보았다. 수업시간에 휘파람을 분 녀석이 있었다. 나는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덩달아 휘파람을 불며 놀았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가슴 속의 새를 날려보라고 했다. 이제 수업시간에 휘파람을 부는 녀석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잘못을 했어도 학생들을 야단치지 않은 나는 그 대가를 지불받게 될 것이다. 그럴까? 정말 그럴까?

내가 행복한 것은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요즘 들어 더욱 확고해진 까닭이다. 그날 아이들은 나와 함께 휘파람을 부르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고 있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때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야? 이런 건방진 녀석 같으니, 당장 나와"

교사가 학생에게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나무랄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창조적인 반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잘못한 아이는 군밤이라도 한 대 얻어맞으면 그뿐이다. 교사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우리 악수종례 할까"

며칠 전에도 전략이 필요한, 즉 창조적인 반응을 해야 하는 비슷한 상황과 마주쳤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한 동료교사가 갑자기 일이 생겼는지 나에게 학급 종례를 부탁했다. 부담임 선생님을 찾기가 어려웠는지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나에게 부탁을 해온 것이다. 나는 흔쾌히 허락을 하고 수업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이 울리기가 무섭게 교실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가방을 챙기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영어 선생님, 웬일이세요?"
"오늘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내가 종례하러 왔어."
"선생님이 우리 반 부담임이세요?"
"응, 마음의 부담임이야."
"그럼 빨리 종례해주세요."
"그래 우선 문단속부터 하고."

문단속이 끝나자 나는 아이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더 없이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몇 번 말을 해도 좀처럼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팔짱을 낀 채 잠시 허공을 보고 서 있자 한 아이가 내 턱밑까지 다가와 종례를 빨리 해달라고 채근을 해댔다.

"종례 빨리해주세요. 늦으면 스쿨버스 못 탄단 말이에요."
"허, 자리에 앉아야 종례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난 너희하고 헤어지기 싫으니까 빨리 가고 싶으면 자리에 앉아."

그때였다. 다른 한 아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그냥 서서 종례해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자 한순간 복잡했던 생각이 다시 단순해졌다.

"좋아. 그럼 우리 악수종례하자."

악수종례란 전에 담임을 맡았을 때 토요일마다 했던 종례 방식이다. 문단속이 다 끝나면 아이들은 앞문으로 나가면서 나와 악수를 한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렇게 조금은 낯간지러운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행복해야 돼."
"선생님두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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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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