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현이를 보며 나의 속도를 반성하다

편지를 통한 교사들과의 소통, 그 주인공은 아이들입니다

등록 2007.05.05 12:14수정 2007.05.0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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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해와 달리 올해는 아이들이 아닌 교사들과 많이 소통하고 있습니다. 올해 담임을 맡지 않아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받는 횟수가 줄어든 까닭도 있지만, 제가 순천지역 사립 고등학교만으로 구성된 전교조 순천사립지회에서 참교육과 관련된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사의 존재이유는 아이들입니다. 해서, 아이들보다는 교사들과 소통의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 시간의 주인공은 아이들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저는 선생님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월요일 아침 전까지는 편지를 받아보고 아이들에 대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주를 시작하실 수 있도록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이지요. 구체적인 대상은 순천 지역 사립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전교조 선생님들이지만 평소 존경하고 아끼는 선후배 교사들에게도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서로 나누고 싶은 마음에 부족하지만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그 여덟 번째 편지의 주인공은 제가 작년에 가르쳤던 욱현이라는 아이입니다. 착하고 평범한 아이인데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그 아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시험 감독으로 들어갔다가 만난 것이지요. 시험 종료를 10분쯤 남겨두고 아이는 자기가 푼 문제의 정답을 OMR 정답카드에 옮겨 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어찌나 느리던지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였습니다. 답을 옮겨 적는다기보다는 나무에 글씨를 조각하는 듯했으니까요.

며칠 뒤, 저도 그 아이처럼 나무에 조각을 하듯이 하얀 종이 위에 한 편의 시를 써 보았습니다. 때마침 광주전남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오월제 행사로 육필(肉筆) 시화전을 한다는 연락을 받은 뒤였지요. 늘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시를 쓰곤 했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참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쭙잖은 한 편의 시와 작은 생각을 담아 보내드린 여덟 번째 편지 제목은 '나의 속도를 반성하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폭력은 과도한 속도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픈 광주의 오월도, 철저하게 입시교육으로 전락해버린 우리 교육도, 지구의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온난화 현상도 따져보면 과도한 속도가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욱현이는 그런 소중한 교훈을 묵시적으로 말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순천사립지회 조합원 선생님들에게 보내드린 편지를 소개합니다.

욱현이는 좀 느린 아이다.
평소에는 그다지 굼뜨지 않지만
시험 기간에는
녀석의 느린 동작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흡사 조각가 같다.
OMR 카드에 서른 문항의 정답을
컴퓨터용 싸인 펜으로 옮겨 적는데
오 분 남짓 걸린다.


서른 개의 빈방마다
한참씩이나 고요한 눈길을 주다가
아뿔싸, 실수를 했는지
정답 카드를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또 오 분을 기다리기가 무료해서
시간이 없다고 다그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의 평화로운 눈빛이
다시금, 한 장의 카드가 아닌
서른 개의 빈방에 가 닿고 있었다.

욱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속도를 반성한다. - 자작시 '욱현이'

한 장의 정답 카드 안에 서른 개의 빈방이 있듯이 한 교실 안에 서른 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서른 명의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요한 눈길이 가 닿지 않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우리 내면에 뿌리내린 속도의 관성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실 안의 아이들을 한 단위로 보는 습관을 고치지 않는 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욱현이를 볼 때마다 저의 속도를 반성하곤 합니다.

순천사립지회 참실 소모임인 '아이들의 인격을 키워주기 위한 교사모임'을 꾸렸습니다. 사이버상의 만남을 위해 카페도 하나 준비 중입니다. 오프라인 첫 만남을 5월 말쯤으로 잡고 있는데 단 한 분이 오시더라도 즐겁고 행복한 모임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입니다. 오늘도 환히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편지 내용의 전부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 종이배를 접어 냇물에 띄워 보내듯 편지를 띄워 보낸 뒤에 저는 작은 수고를 한 저 자신에게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참 행복한 느낌입니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겠지요. 월요일 학교에 가면 수업시간에 만나는 아이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마치 조각가가 나무에 아름다운 그림을 새기듯이 말입니다.
#참교육 #교사 #전교조 #순천사립지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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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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