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아이들이 많이 변했어요!"

'갈수록 선생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후배교사에게 해준 조언

등록 2007.04.25 09:57수정 2007.04.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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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업시간마다 아이들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자주 듣는다. 어린 제자들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을 까닭이 없지만 사랑의 언어를 전해 받는 내 표정이 그리 환하지만은 않다. 하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그만 사랑이 물린 것일까? 세상이 열 번 뒤집혀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아이들의 상상력 빈곤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영어시간에 출석을 부르면 "Yes, sir" 나 "Here"로만 짧게 대답하지 말고 영어 문장을 하나 만들어 대답해보라고 했다. 전날 배운 문장도 좋고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인사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선뜻 입을 열지 못하자 할 말이 없으면 "I love you"하라고 말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그 후로는 아이들 거지 반이 마치 앵무새처럼 앞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한 아이가 내 영혼의 맨살을 살짝 건들었다.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어요!)"
"I hope your dreams come true!(너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래!)"


아이와 눈을 맞추고 그런 말을 주고받은 뒤에 나는 반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배운 팝송 제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꿈이 있다고 말한 것이 참 신선했어요. 선생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지만 여러분에게 꿈이 있는 말이 저는 더 좋아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여러분이니까요."

그날 오후였다. 대학 후배라 평소 말을 놓고 지내는 이 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학생들과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애들이 수업시간에 어찌나 떠드는지 안 되겠다 싶어 기합을 좀 주었더니 저더러 하는 말이, 왜 영어 선생님처럼 말로 하지 기합을 주냐는 거예요. 언젠가 수업시간에 휘파람을 불었는데 영어 선생님은 자기를 혼내지 않고 교실에 새가 한 마리 날아왔나 보네! 하고 말해서 속으로 감동을 먹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수업을 열심히 했다고 하면서 자기들만 변하라고 하지 말고 선생님들도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 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상황파악을 하고 바로 웃음을 거두었다. 제자에게 그런 말을 들은 순간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을까? 그렇다고 나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다행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조금은 과장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웃기는 녀석이 있나? 그 반 애들 내 수업시간에도 무지하게 떠들어요. 요즘에야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떠들 녀석들이야. 지네들 잘못은 생각 않고 선생님한테 잘하라니 참 웃기는 짜장면들이네. 내가 알아듣게 얘기할 테니까 마음 풀어."

전에도 이런 일이 한두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동료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처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청소시간, 나는 교실에 있는 문제(?)의 아이를 밖으로 불러냈다.

"너 얼마 전에 교실에서 휘파람 불었을 때 말이야. 다행히도 그날 선생님 컨디션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한테 혼났을 거야. 너 같으면 수업 시간에 휘파람을 분 학생을 가만두겠니? 야단을 치고 혼을 내주는 것이 당연한 거지. 그것도 하나의 사랑의 방법이야. 선생님이 널 나쁘게 말한 건 아니야. 하지만 네 말 듣고 마음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더라. 선생님들도 변해야 한다는 말 맞아. 하지만 난 너희들이 먼저 변했으면 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너희들이니까."

아이는 내가 말을 하는 동안 황소처럼 눈만 껌벅껌벅할 뿐 아무런 대꾸가 없더니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만 가보라고 하자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점심시간이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우연히 이 선생과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운동장 쪽에서 걸어오던 그 아이와 마주쳤다. 아이는 인사도 없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우리를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못 본채 한 것인지 나로서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이 선생과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보셨지요? 인사도 않고 가잖아요. 세워놓고 야단을 치려다가 말았어요."
"잘했어. 좋은 타이밍이 아니야. 그래 봐야 반감만 살 거야."

"그래도 잘못한 것은 지적해주어야 고치지 않겠어요?"
"당연하지. 그런데 말이야. 어떤 책에 보니까 가장 현명하지 못한 상사는 부하직원이 잘못하고 있을 때를 기다렸다가 지적하는 사람이래. 반면에 가장 현명한 상사는 부하직원이 잘할 수 있도록 미리 배려하거나 잘하고 있을 때 칭찬을 한다는 거야.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솔직히 미움이 있다 보면 그러고 싶지 않은 거지."

"맞아요."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에도 우리는 봄 햇살이 따사로운 교정을 거닐면서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에게 잘 해주고 싶어도 여선생이라고 얕잡아 보는 아이들 때문에 처음부터 무섭게 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며, 그것이 옛날에는 통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통하지도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며, 갈수록 선생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속내를 털어놓는 이 선생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아이들의 진실에 호소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교사들도 많을 거야.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지. 아이들을 믿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분명 길이 보일 거야."

그때 내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 선생을 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이 선생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아이들이 많이 변했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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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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