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센닌바리가 반전의 표현이라고?

[주장] 무사귀환 바라던 풍습을 왜곡하는 일본 학자들

등록 2007.05.09 12:13수정 2007.05.1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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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센닌바리의 모습.

센닌바리의 모습. ⓒ 일본 쇼와칸 홈페이지


중일전쟁 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일본의 거리에서 유행한 것이 있다. '센닌바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센닌바리는 출정하는 군인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제작한 것으로서, 1m 정도의 백색 천에 붉은 실로 바느질을 한 것을 가리킨다. 1000명(千人)이 바느질(針) 한 땀씩 동참했다고 하여 센닌바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던 여인들의 마음

센닌바리를 만든 사람들은 주로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낸 일본 여인들이었다.

어떤 여인들은 집안 남자가 전쟁터에서 사선을 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전 5전을 꿰매어넣기도 하고 혹은 고선을 넘기는 바라는 마음에서 9전을 꿰매어 넣기도 하였다 한다. 일본어에서 사(死)와 사(四)는 시(し)로, 고(苦)와 구(九)는 쿠(く)로 발음되고 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에 일본 여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길거리나 역 앞에서 행인들에게 한 땀씩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공장소가 센닌바리 열기로 가득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군인이 센닌바리를 몸에 부착하면 적군의 총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센닌바리는 실제로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족을 전쟁터에 내보낸 여성들은 센닌바리를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었고, 또 천명이 하나의 센닌바리를 만듦으로써 국민적 일치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런 풍습이 없었다면, 후방의 민간인들은 훨씬 더 불안감에 떨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가 의도한 총력전의 효과를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센닌바리가 일본 국민의 내면화된 저항?

a 전시된 센닌바리.

전시된 센닌바리. ⓒ 일본 니시시 홈페이지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센닌바리에 대한 일부 일본 지식인들의 관점이다.

제3자가 보기에는, 전쟁 기간 동안에 일본에서 유행한 센닌바리 열기는 다분히 일본 국민들을 총력전으로 통합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전쟁 동원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내면화된 저항'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국가가 일본 청년들을 전쟁으로 동원하는 데 대한 소극적이고 내면적인 저항감의 표출이 바로 센닌바리 열기라는 것이다.

일본의 민속학자인 이와타 시게노리가 저술하고 1996년에 도쿄 미라이샤에서 발행한 <촌의 청년, 국가의 청년>이라는 책의 186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일본 국민은 지배질서에 대한 위화감을 전혀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저항으로는 분출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위화감을 내면화하고 지배질서에 대한 이의의 표출을 민속으로써 분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을 전쟁으로 동원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내면화된 저항감의 표시로 일본 여인들이 센닌바리를 열심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책임을 희석화하기 위한 주장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 표현에 대해,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어느 역사학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의 전쟁 동원에 반감을 가진 일본군인들 중에는 오히려 더 열심히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저항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면서 "한국인이나 서양인들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정서"라고 덧붙였다.

남자 없는 집에서 왜 센닌바리를 만들었나

그러나 센닌바리가 국가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이와타 시게노리 자신이 위의 책에서 소개한 몇 가지의 사례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고우 시즈고(요코하마 거주)라는 여인의 사례를 보면, 센닌바리 열기에 '위로부터의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고우 시즈고의 집안에서는 센닌바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전쟁터에 나간 집안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모녀는 열심히 센닌바리를 만들었다. 거리로 또는 역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동참을 권유했다. 왜 그랬을까?

그 점을 이해하려면 고우 시즈고의 어머니가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를 보면 될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애국부인회 소속이었다. 이와타 자신도 "그녀의 어머니가 애국부인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센닌바리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만약 센닌바리가 전쟁 동원에 대한 저항감의 표출이었다면, 애국부인회 회원들이 열심히 센닌바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것도 공개적으로 또 대대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센닌바리가 국가에 대한 저항감의 표현이었다면, 전쟁 기간 동안에 거리에서 센닌바리 열기가 나타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그것을 묵인했을 리 없다.

센닌바리를 통해 일본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저항감을 표출했다는 일부 일본 지식인들의 주장은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센닌바리 열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전쟁터에 남자들을 내보내는 일본 여인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일본 여인들은 센닌바리가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 국민들은 더욱 더 열심히 국가의 총력전 정책에 동참했다. 만약 후방의 국민들이 전쟁터에 나간 가족을 크게 염려한다면, 후방 국민들을 총력전에 동원하는 데에 한계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는 한편에서는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또 한편에서는 센닌바리 열기를 통해 청년들의 가족(특히 여자)들을 전쟁에 '안착'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국민들도 공범이었음을 인정하라

이처럼 센닌바리라는 전쟁 풍습은 기본적으로 전쟁에 협력하는 의미를 갖는 것인데, 이를 두고 전쟁 반대의 소극적·내면적 표현이었다고 '재조명'하는 것은 다분히 억지 같은 논리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이 진정으로 이웃나라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면, 역사에 대한 허황된 재조명 혹은 재해석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에 국왕(소위 '천황')뿐만 아니라 전체 일본 국민이 모두 공범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이 먼저 잘못을 인정한 다음에야, 그에 대한 용서도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종성 기자는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동북아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종성 기자는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동북아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습니다.
#일본 #역사 왜곡 #센닌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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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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