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필요한 거 없수?" 못말리는 목사님

[자전거 세계일주 7] 뉴욕 주 포킵시

등록 2007.05.26 11:15수정 2007.05.2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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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한국 사람은 한국을 떠나봐야 한국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내 나라를 떠나면 특히 식(食)과 관련한 모든 기관은 토속적인 것을 강렬히 원한다. 물론 장기간 현지에 가면 현지 음식에 적응하는 것이 급선무이긴 하지만 구태여 손에 잡히는 고국의 음식까지 마다할 이유는 없다.

총각김치에 골고루 잘 발라진 새빨간 고춧가루가 깊은 심연에 빠져 있던 식욕을 일순간 돋구어낸다.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빈 소년 합창단의 할렐루야 찬송이 울려 퍼지듯 모든 세포들은 일제히 환호한다. 난 어쩔 수 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뉴욕 주 포킵시에 위치한 미드 허드슨 한인감리교회에서 참 많은 섬김을 받았다. 18세기 존 웨슬리가 영국국교회를 부흥시킨다는 취지로 시작한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감리교는 한국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난 감리교 신자가 아니다. 내 신앙의 뿌리는 성결이고 대학생 때는 장로교회를 섬겼다. 우연찮게 밖에 나가서는 이 두 교단보다 감리와 침례교회의 예배를 드린 때가 많았다. 하지만 교단이 무슨 대수인가? 권력과 명예, 물질에 대한 아집으로 가득 차 밥그릇 싸움만 안하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이제는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교회가 교회 안에서만 내재적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현실에 회의가 든 때도 있었지만 여전히 사명을 가지고 신앙인으로 본이 되며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부디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나 내 안에 은혜와 도전을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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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미드 허드슨 감리교회 부활절 예배. ⓒ 미드허드슨감리교회

총각김치에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우자 사모님께서 다시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내오신다. 지금은 전도사로 사역 중인 첫째 아들이 나와 동갑이란다. 둘째도 아들인데 육사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 시선을 잡아끈다. '보통 내기가 아닌가 보군.' 도착해서 아직 적응중인 과객을 아들처럼 대해 주시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맙고 부담스럽다.

"이거 좀 더 드세요."
따뜻한 미소로 연신 먹을거리를 퍼주는데, 도저히 거절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하루 네 공기 외에 이것저것 간식까지 챙기게 된다.

"냉장고에 있는 것 무엇이든지 꺼내 드시고, 내 집처럼 편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먹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신 목사님은 마치 관광가이드처럼 TV와 욕실 사용법, 그리고 며칠 간 머물게 될 숙소에 대해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신다. 편안하다. 기지개를 활짝 피고, 붕어 하품 한 번 하니 피로가 몰려온다.

새벽을 깨운다. 하루 첫 시간 기도를 통해 주님 앞에 나를 낮추며 그 분의 섭리를 알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신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거늘 늘 말도 안 들으면서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며 바라는 건 또 많기도 하다.

"날씨가 너무 더워요. 그리고 잘 먹게 해 주세요. 편안한 곳에서 잠자게 해 주세요. 좋은 사람들도 만났으면 해요."

이건 뭐 온통 유치의 극을 달리는 기도뿐이다. 인류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 나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대인배의 자세는 어디 가고 훈련병 시절 먹고 자는 것에만 몰두했던 모습처럼 완전히 원초적인 생의 욕구에 대해서만 기도를 늘어놓고 있다. 역시 난 아직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기까지 멀었나 보다.

"우리 옆사람과 이렇게 인사해 볼까요? 제 옆자리에 앉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의 천사입니다. 내가 당신의 천사인 거 아시죠?"
수요예배 시간.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든 뒤 자전거 세계일주 강연이 이어진다.

"여러분의 열정과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꿈과 다짐들, 그 약속들을 지금 지켜나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하고 찬양했던 수많은 고백들은 여전히 삶 가운데 물음표만을 안겨 주고 있지는 않은지요. 저는 저의 자전거 일주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감동, 그리고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담대하게 선포한 갈렙의 외침처럼 확신에 찬 믿음으로 나가길 소망합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2003년 자전거 전국일주에서부터 2005년 중국 자전거 종단, 그리고 지난해에 알래스카에 갔던 이야기들을 나눴더니 1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말을 조리 있고 또 재미있게 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머쓱하게 설명만 잔뜩 늘어놓게 된다. 그것도 눈꺼풀을 한없이 끌어내리는 일정한 톤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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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주 포킵시에 한적한 언덕에 위치한 미드 허드슨 감리교회. ⓒ 문종성

이렇게 수요일에는 목사님의 배려로 예배 시간에 자전거 세계일주에 대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많은 분들 앞에 서서 조금 쑥스러웠지만 여행의 취지와 내용, 앞으로의 비전 등을 나누면서 의미 있는 교제를 가졌다.

이틀 동안 푹 쉬고 이제 출발하려는 찰나 목사님께서는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지난 번 잃어버린 슬리핑백과 비슷한 것을 하나 사주시고, 다니면서 각종 여행 기록을 저장할 수 있게 외장 디스크까지 구입해 주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으로의 루트에 대한 세밀한 도로지도까지 프린트 해 주셔서 다음 목적지까지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게 꼼꼼하게 챙겨주셨다. 거기에 떠날 때 여행경비까지 후원해 주신 교회 분들. 아, 세찬 파도처럼 감격이 밀려온다. 언젠가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눠주는 그런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뭐 더 필요한 거 없어요?"
목사님의 지칠 줄 모르는 섬김, 정말 못 말린다. 초면인 청년을 이렇게 환대하시고 되레 주인의 입장에서 더 조심하면서 아들 뻘인 나에게 깎듯이 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출발 당일인 목요일에는 목사님 내외분과 중국 식당에서 뷔페로 속을 든든히 하고 교회 앞에서 사진을 찍은 후 인사를 드렸다.

"목사님, 그 동안 잘 대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종종 소식 전할게요."
"그래요. 건강하게 잘 다니세요. 종종 연락 하시구요. 기도하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더 숙인 다음 밝은 미소로 다음 도착 예정지로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참 좋으신 분을 만나서 기분까지 좋아진 3일 간의 휴식.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달리다 보니 힘든 것도 모르겠다.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성경 마태복음 5장 41~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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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딸 크리스티나와 함께 집 뒤뜰에서 엘레나. 지나가는 내게 이것저것 간식을 챙겨주었다. ⓒ 문종성

한참을 달리다가 보니, 숲 속 한 켠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자, 이 쪽으로 턴하세요."
이크! 목사님이시다. 목사님은 내가 행여 길을 잘못 들까봐 일부러 앞에 가셔서 분기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거였다. 환하게 웃으시는 목사님께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또 낯익은 차량이 도로 분기점에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형제, 이번엔 왼쪽으로 가야 해요."
"네, 목사님. 여기까지 오셨어요? 하하. 이제 괜찮습니다. 그만 들어가세요."

그 배려가 참 소중하고 고마웠지만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신다 싶어 들어가시라고 웃음을 건네며 인사들 드렸다. 이제 혼자가 되어 상쾌한 자연 속으로 힘차게 달리는 길. 그런데 저만치서 또 어디서 많이 본 차가 정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보나마나 또 목사님이시다. 역시. 목사님은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셨지만 왠지 또 따라오실 분위기. 그렇게 다섯 번에 걸쳐 미리 앞서가셔서 길을 체크해 주신 목사님은 무려 5km를 동행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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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의 휴식동안 따뜻하게 배려해 주신 진성인 목사님과 사모님. ⓒ 문종성

나중에 우연히 안 사실이지만 목사님은 서울대와 보스턴대를, 사모님은 예일대를 나오셔서 변호사로 일하시는 소위 명문대 인재셨다. 그럼에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가짐으로 상대방을 대해주시는 점은 권위와 형식주의의 구태의연한 사고로 교회를 정치세력화하는 요즘 세태에 못내 못마땅했던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입술로만 섬기는 게 아니라 직접 본이 되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목사님의 삶을 통해 난 깊은 인격적 존경을 품게 되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오로지 이해타산에 맞춰 계산하고 평가하는 시대에 순수하게 남의 일을 도와주고 직접 챙겨주는 것이 쉽지 않는 세상이다. 이것을 그냥 마음 속에 품는 하나의 추억이 되지 아니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하자는 의미로 깊은 심호흡을 들이켜 본다. 이번엔 안 따라 오시겠지 설마. 그러면서 자꾸 라이딩 중에 고개가 뒤로 돌려진다.

'진성인 목사님과 미드 허드슨 감리교회 여러분들, 따뜻하게 섬겨주심에 참 감사합니다.'

여행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세상에서 내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작은지 두고두고 깨닫게 하니까. - 플로베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버몬트 주 벌링턴(Burlington)지역으로 향하고 있으며 몬트리올로 갈 예정입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버몬트 주 벌링턴(Burlington)지역으로 향하고 있으며 몬트리올로 갈 예정입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세계일주 #미국 #세계여행 #자전거여행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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