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22회

등록 2007.06.26 08:15수정 2007.06.26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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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이다.

“쇄금도였습니까?”


“그 녀석은 반드시 해야 할 두 가지 일 중에 하나만 이루었지. 목갑을 손에 넣지 못했어….”

“쇄금도가 살해당했습니다.”

“아주 필요하고 유용한 패를 잃어버린 것이지.”

윤석진은 상만천에게 아주 유용한 존재였다. 먹이를 던져주고 시키는 대로 재주를 부리게 할 수 있는 존재. 언제나 자신에게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던져주길 바라는 그런 존재 말이다.

“단순히 그런 정도가 아니고, 쇄금도가 자신의 사부를 시해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고 죽였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으음….”

용추의 말에 상만천은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필요한 패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 녀석을 꿰뚫은 검은 결국 나를 향하게 되겠지.”

씹어뱉듯 중얼거리는 상만천을 향해 용추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이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추태감과 손을 잡아야 하겠군요.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반자 관계 말입니다.”

그 말에 상만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용추의 말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음에 틀림없었다. 허나 용추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속단하지마…. 지금까지는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에게 희롱 당했지만 안개가 걷혔어.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

“……!”

“일단 그 자를 불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지. 그리고 자네 말대로 추태감과 확실하게 손을 잡으면 돼. 그 결맹은 이 운중보를 나가는 순간부터 깨질 것이지만….”

물론 추태감 측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똑같은 동상이몽이지만 이 운중보 안에서만큼은 혈맹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것쯤은 이미 눈감고도 알 수 있는 인물들이 상만천과 추산관 태감이다.

“철기문의 옥청문을 불러…. 이미 추태감이 혈간에게 손을 쓴 것을 아는 이상 추태감에게는 적극적인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야. 내 쪽에서 부르는 것이 좋아. 나중에라도 써먹을 곳은 무궁무진하니까….”

상만천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용추가 모를 리 없다. 어차피 이 길밖에는 없다. 하지만 용추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외통수…! 장기를 두다보면 상대의 말이 움직임에 따라 최선을 다해 대응해 가야 하는 수순,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어 파국을 맞게 되는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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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이지. 나는 사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를 죽였을 뿐 아니라 사문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그를 죽여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게…. 더 이상 일이 시끄럽지 않게 묻어두기 위해서도 말이다.”

“……?”

설중행은 의아했다. 우선은 이 운중보를 떠나 있었던 쇄금도 윤석진이 두 가지 패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의아했고, 또한 이렇게 쉽게 자신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사실 궁수유가 뭐라하든 백도가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또한 이렇게 일일이 자신에게 설명해 줄 의무도 없었다.

“우선 그는 자신을 길러주고 사랑을 준 사부를 배신했다. 상만천의 은근한 제의를 받아들여 그의 사위가 된 것이지.”

“단지 사위가 된 것만으로…?”

“아니… 이곳을 떠나기 전부터… 상만천의 달콤한 제의와 회유에 넘어가 있었지. 윤석진에게도 야망이 있었어. 이 운중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지.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는 운중보를 차지할 수 있는 길은 없었어.”

“……!”

실권을 철담이 쥐고 있었다고는 하나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위치로 보아 운중보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상만천이 그의 그런 약점을 파고 든 것이지. 부(富)와 명예…. 누구나 꿈꾸는 중원무림의 주인인 운중보의 주인이라는 자리는 누구도, 또한 그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으니까…. 그는 상만천의 사위가 됨으로써 그것을 약속받은 것이야.”

“아무리 상만천이 약속을 했다고 해도 그런 일이 가능했겠소?”

“가능 여부를 떠나 윤석진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겠지. 그리고 그는 상만천의 사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충실한 개가 되었지. 주인이 물으라고 소리치면 달려가서 무는 개…. 운중보를 떠나 있으면서도 운중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만천에게 보고했어. 특히 사부에 대해서는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보고했지.”

“어떻게…?”

“윤석진과 같이 죽은 진가려는 이곳 매송헌의 대소사를 처리했던 계집이었어. 이곳 누구보다 사부님의 동태를 면밀히…. 세심하게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지.”

“철담어른을 시해한 자도 윤석진이었다는 말이오?”

“물론… 아마 상만천의 지시를 받았겠지. 그는 입보한 그 날 오랜만에 만난 사부와 사제지간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사부를 시해했지.”

윤석진은 사부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성곤어른이 있는 바람에 잠시 진가려와 같이 있었다가 들어가 보니 사부가 죽어있었다고 했다. 그것 모두가 거짓말이었던가? 설중행이 아는 한 백도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으음….”

신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철저하게 사부를 배신했다. 어떻게 운중보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여인과 혼인을 했다는 점에서 백도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으음….”

신음이 입술을 헤집고 절로 흘러 나왔다. 철담을 죽인 자가 그럼 쇄금도 윤석진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윤석진이 철담과 같은 인물을 살해할 정도의 능력이 있었을까? 도대체 제자라 해서 아무리 경계를 하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 사부를 시해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소?”

그는 자신의 피가 빠르게 전신을 돌고 있음을 느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없지. 하지만 사부가 무공을 일시 상실한 상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것도 쇄금도로 심인검과 유사한 흔적을 남기면서 말이야.”

설중행은 고개를 흔들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오. 철담어른 같은 인물이 무공을 상실하다니…?”

그러다 문득 설중행은 누군가 생각난 듯 나직하게 신음성을 발했다.

“진가려…!”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군. 사부의 찻잔에 백일취(百日醉)를 묻혀 놓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지. 물론 찻잔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 점심에 나온 음식에도 섞어 놓았지.”

백일취는 금방 효과가 나지 않는다. 복용한 후 적어도 반 시진은 지나야 전신으로 퍼지게 된다. 그리고 복용한 사람 역시 무공수위에 따라 다르지만 그 정도의 시각이 흘러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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