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상처를 외면한 나, 행복한가

다시 생각해 보는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에 말 걸기'

등록 2007.07.04 09:56수정 2007.07.0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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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으나마나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에 민감한 교사와 무감각한 교사, 둘 중 어느 쪽이 아이들에게 유익한 교사일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고 나에게 삿대질이라도 해댈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있다.

'아이들의 상처나 아픔에 민감한 교사와 둔감한 교사, 둘 중 어느 쪽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교사일까?'

아이들의 상처나 아픔에 민감한 교사는 늘 아플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이들의 상처나 아픔에 둔감하거나 무감각한 교사는 아이들로 인해 아프지 않아도 된다. 아프지 않다는 것은 좋은 일이요, '나'에게 유익한 일이다. 하여,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을 애써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들의 상처를 발견하는 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한 교사의 경우라면 그런 의식적인 노력을 할 필요조차도 없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존재이니 그것을 탓할 수만도 없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그리하여 아이의 상처를 외면한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의 인간적인 미숙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이보다 나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은 그 존재감으로 인해 나의 불편함이 가중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존재는 작아진다. 결국 아이는 나에게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아이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축내고 있는 나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언젠가 한 아이와 면담 중에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 앞에 한 아이가 있고, 그리고 나는 없었다. 아니, 있다가 사라졌다. 아이의 존재감이 한 우주의 크기로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나의 존재감이 무시 되어도 좋을 만큼 작아진 것이었다. 그 아이의 상처와 아픔에 집중할수록 그 아이로 인해 불편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내가 없으니 고통도 없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에 말 걸기'는 내가 십 수년째 정기구독을 하고 있는 <우리교육> 6월호 특집 제목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이 특집기사를 기차 속에서 슬픔에 잠겨 읽고 있었다.


책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감당 못할 슬픔에 젖어 있었고, 오랜만에 찾아온 '온전한 슬픔'으로 인해 나는 모처럼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 신기한 경험이 이런 볼품없는 시로 그려진 것은 순전히 내 어쭙잖은 솜씨 탓이다.

슬픔


무슨 슬픈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이 흠 없는 온전한 슬픔이 얼마만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황등역 너른 벌판을 지나며
나는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차가 논산을 지날 무렵
일흔 안팎의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으시고
당신의 딸처럼 보이는 마흔 안팎의 아낙은
입석표를 끊었는지 통로에 비스듬히 서서
노모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발밑에 두었던 가방을 수습한 뒤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낙을 노모 곁에 앉히고는
통로를 걸어 나왔다.

물이 흐르듯 꿈을 꾸듯
무언가에 등 떠밀려
객실과 객실 사이를 서성이다가

문득,

두 모녀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내 안에 찾아온 슬픔이 시킨 일임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찾아온 슬픔이 시킨 일'은 '두 모녀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더러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주고 싶었다. 생면부지의 낯선 누군가를 위해 나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도 하나도 억울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슬픔 속에 있었지만, 나는 평화로웠으며, 조금도 불행하지가 않았다.

a <우리교육> 6월호 표지

<우리교육> 6월호 표지 ⓒ 우리교육(주)

그런 묘한 슬픔에 젖어 기차 속에서 읽은 월간지 <우리교육> 6월호 특집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에 말 걸기'는 그동안 우리 학교교육이 얼마나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에 무심했는지를 통렬하게 적시하고 있었다.

결국은 '그 상처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분출됨으로써 아이들은 점점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감수성을 잃어간다'라고 <우리교육>은 우리 교육을 진단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문제 상황에 대한 진단은 넘쳐났지만 교육적인 성찰의 목소리는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교육적인 성찰의 목소리가 없었던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계삼(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가 지적하듯, '일없이 편하게' 가려는 안락에 대한 충동 때문이리다. 이 교사는 또 이렇게 말한다.

"성장기의 모든 시간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응시하고, 대화하고, 어루만져주고, 그럼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 '교육의 기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살기 위해' 상처를 내면 깊숙한 자리에 묻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다닌다."

바로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 내 안에 준비된 슬픔과 책을 통해 만난 또 하나의 슬픔이 어우러져 나를 온전한 슬픔에 젖게 한 순간이. 그 흠 없는 온전한 슬픔이 나를 구원하였듯이, '상처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다니는' 아이들도 그 상처가 거름이 될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하여 이 교사는 글의 말미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아이들의 상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상처 속에서 자라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내가 만약 슬픔 속에서 기차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상처 속에서 자라날 기회를 주자'는 그의 말이 얼른 납득되지 않거든 오랜만에 온전한 슬픔에 젖어 기차여행이라도 해볼 일이다.
#우리교육 #아이들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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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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