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와이프 보이'가 아니었다

자신과 조선의 영화만을 바란 군주

등록 2007.07.05 13:55수정 2007.07.0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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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하면 떠오르는 것은 명성황후다.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휩싸인 나약한 군주였다는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 고종의 개인적 역량을 부각시키는 연구들이 나와서 그의 이미지를 일정 정도 개선하기는 하였지만, 고종 하면 아직도 왠지 누군가로부터 조종을 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고종시대의 정치적 상황들을 음미해 보노라면, 고종과 그의 주변 인물들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상대방을 이용했는가 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상사의 새로운 방침이나 최고권력자의 새로운 정책이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가 많을 것이다. 뭔가 중대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낼 수 없는 경우에, 그 의도를 찾아내는 최종적 방법은 그 방침이나 정책의 결과를 통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의도를 추출하는 것이다. 처음에 숨겨졌던 의도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결국 그 방침이나 정책의 결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 속 인물의 심리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 역시 그 인물의 전체 행위 속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심리나 의도를 추출하는 것이다. 범죄자가 흔적을 남기듯이, 역사 속의 인물 역시 행위를 통해 그 의도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조선 제26대 군주인 고종의 경우에도 위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그의 심리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자신들의 속마음을 일기장에 남기지도 않았고 또 그들의 심리구조가 역사서에 남아 있지도 않지만, 우리는 고종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어떤 일관된 패턴을 통해 그의 심리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정치행위는 고종의 의지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종의 친정(1873년) 이후로부터 1899년 로젠-니시 협정 때까지 고종의 정치행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는 외부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 1873~1899년 시기에 고종의 정치행위는 다른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그 자신의 판단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899년 로젠-니시 협정은 러·일 간에 체결된 협정으로서 러시아는 만주를, 일본은 한반도를 확보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개항 이후 처음으로 특정 국가의 단독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후 고종은 실질적 리더십을 상실하고 국권상실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2005년 논문인 <1899년 한청통상조약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73~1899년 기간의 중간에 있는 1882~1894년에 고종이 청나라의 강도 높은 간섭을 받기는 했지만, 1882~1894년 기간에도 청나라의 영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사상 최초의 내정간섭에 성공하긴 했지만,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본다면 그러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영국·러시아·미국·일본 등의 묵인 내지는 후원에 기초한 것이었다.

1882~1894년 기간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간섭을 행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정치행위는 궁극적으로 조선측의 최종적 결정을 통해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1882~1894년을 포함하여 1873~1899년 기간에 조선의 정치적 행위는 결국 조선의 최고통치자인 고종의 정치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조선이 행한 정치적 행위가 고종의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은, 1873~1899년의 정치상황이 결국에는 고종이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에서 도출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벌어진 각종 정변에서 희생된 쪽은 언제나 고종의 라이벌 혹은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인 인물이 희생된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 인물들이 항상 희생된 것이다.

만약 고종이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싸인 인물이었다면, 위 기간 동안에 명성황후의 정치적 플랜이 표면화되거나 혹은 명성황후가 최종적 승자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뒤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이 기간 동안에 결국 성취된 것은 고종의 플랜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고종뿐이었다.

<조선책략>에 찬사를 보낸 고종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고종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경과과정을 보면 고종을 조종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제거되면서 결국에는 비록 잠간이나마 고종이 의도했던 정치적 플랜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고종이 의도한 정치적 플랜이 무엇이었는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고종이 계획한 것은 국제적 세력균형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이 일본·청나라·미국·러시아·영국·독일 등을 끌어들인 것은, 어느 한 나라도 조선에서 절대적 힘을 갖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고종의 정책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종이 그 같은 전략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1880년 10월에 황준헌 저 <조선책략>의 건의를 적극 수용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청나라와 친하고 미국과 연대하며 일본과 결합하는 친청·연미·결일을 통해 러시아를 방어하고 조선을 지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조선책략>은 사실 고종이 그 이전부터 이미 품고 있던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1882년 10월 2일에 귀국한 수신사 김홍집이 황준헌에게서 선물 받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진헌하자, 고종이 “청나라 외교관들도 나와 국제인식이 같다”며 고무된 반응을 보이고, 불과 9일 만인 10월 11일에 고종이 조회를 열어 <조선책략>에 대한 중신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조선책략>이 고종의 마음을 바꾼 게 아니라 사실은 고종이 <조선책략>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지를 실행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책략>의 경우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종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이나 힘을 빌려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외세를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 자신의 의중이면서도 그것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청나라 외교관들이 그렇게 권고한다"면서 <조선책략> 핑계를 댄 것도 그렇고, 실제로는 자신이 의도한 일이면서도 명성황후나 김옥균 같은 인물들을 표면에 내세워 개화정책을 추진한 것도 그렇다. 그것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 아래에서 10년간이나 허수아비 임금을 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퍼스낼리티일까.

열강을 끌어들여 조선에서 세력균형을 형성하겠다는 고종의 의지는 1882년 이후로 하나씩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1882년에는 그 청나라의 도움을 빌려 미국·영국·독일을 끌어들였고, 임오군란(1882년) 이후에는 청나라의 힘이 너무 강화되자 미국·러시아에게 도움을 구했으며, 그때 미국이 거부하자 1884년에는 국제적 견제를 뚫고 러시아를 조선에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1884년 조·러 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영국·청나라·미국·일본의 견제와 반대를 뚫고 러시아를 조선에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의를 갖는 사건이다. 고종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외교적 수확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정변 때마다 희생된 고종의 라이벌들

그런데 청일전쟁(1894년) 이전에는 고종의 의도가 추진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고종이 청나라를 포함한 열강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청나라의 힘이 너무 비대해져서 세력균형이 성취되지 못했다. 고종이 불러들인 청나라는 오히려 고종을 압박하는 요인으로까지 작용했다. 그래서 청일전쟁 시기까지는 '세력균형을 통한 조선 독립의 이상'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고종의 희망은 청일전쟁 이후에 잠시나마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의 전승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 틈을 타서 고종은 아관파천(1896년)을 단행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였으며, 이로써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일본의 세력균형이 조선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어느 한 나라도 조선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 고종의 운신의 폭이 넓은 편이었다.

이런 상황이 앞에서 언급한 1898년 로젠-니시 협정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96~1898년은 그 이전의 20여 년간 고종이 추진해 온 세력균형이 조선에서 실현된 유일한 기간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세력균형이 형성된 틈을 타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자처했다(1897년). 고종이 의도한 ‘세력균형을 통한 조선 독립’은 대한제국 선포와 칭제로 일단락되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러시아와 일본의 협정에 의해 그 같은 세력균형이 파괴되긴 했지만, 적어도 고종 입장에서는 1897년 제국 선포 및 칭제가 자신의 정치적 생애에서 최절정기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가 고종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이 이 같은 정치적 이상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정변이 발생할 때마다 고종의 라이벌 혹은 주변 인물들이 하나씩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임오군란 당시 고종 개인의 파병요청에 의해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대는 엉뚱하게도 고종의 아버지이자 라이벌인 흥선대원군을 중국 천진(톈진)으로 납치해 갔다. 그리고 서구화를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그 임오군란 때에 대원군과 함께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고종이 불편해하는 흥선대원군과 그 지지세력이 청나라에 의해 해결된 셈이다.

그리고 갑신정변(1884년)을 계기로 해서는 김옥균 등을 포함한 친일적 개화세력이 제거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물론 이 세력의 제거가 고종에게 반드시 정치적 이익이 된 것만은 아니지만, 고종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정치세력 중 하나가 갑신정변을 계기로 제거된 것이다.

또 을미사변(1895년)을 계기로 해서는 고종의 최대 지원군이 될 수도 있고 고종의 최대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명성황후 세력이 와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명성황후 역시 서구화 개혁에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일본과도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점은 명성황후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반대하지 않은 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명성황후가 일본에게 해가 된다는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고종은 이에 대해 별다른 구조를 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에 고종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삼국간섭 때문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일본이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이 조선의 황후를 시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청일전쟁 개전을 위해 40일간이나 국제정세를 면밀히 조사한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시의 일본은 국제정세에 상당히 민감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때의 일본은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만 스스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을미사변은 그런 일본의 신중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쉽게 감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튼 을미사변을 계기로 명성황후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었다. 만약 명성황후 세력의 소멸이 고종 자신에게 불리하기만 했다면, 그 이후 고종의 정치력이 약화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은 오히려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때로는 과감한 정치적 모험(아관파천)도 단행했다.

와이프 보이였다면 실패는 덜 참혹했을 것

종전에는 자신이 직접 정치 표면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대원군 세력과 친일적 개화세력(김옥균 등)과 명성황후 세력이 모두 제거된 다음에는 오히려 원기왕성하고 활력적인 정치력을 과시했다. 의욕을 잃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의욕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그의 엉뚱한 활력을 보여 주는 것이고, 대한제국 선포는 그의 때 아닌 원기왕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의욕적인 개혁군주 공민왕이 사랑하는 노국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것과 대조하면, 고종은 명성황후가 죽은 이후에 오히려 원기충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정치력으로 승화시킨 결과일까.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위협이 될 수 있는 주변의 정치세력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 고종은 위와 같이 정치일선에 전면 등장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왕성한 정치력을 보여 주었다. 고종이 남에게 이용만 당한 인물이었다면 과연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이렇게 고종시대에 드러난 사건들의 경과과정과 결과를 놓고 본다면, 고종이 결코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는 무기력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성취된 것은 고종의 이상(독립제국 및 칭제)이었지 명성황후의 이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것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었다. 고종이 부인에게 이용당하는 신세였다면,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는 남이 고종을 이용한 것 같았지만, 그 ‘남’들은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 때에 하나씩 제거되고 결국에는 고종 한 사람만 남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고종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직접적으로 정치현장에 뛰어들었다. 고종을 이용하고 고종의 앞에 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결국에는 모두 하나씩 외세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런데 고종의 실패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는 내부 사람들을 적에게 넘겨주거나 혹은 적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았다. 결국에는 자기 혼자만 살아남아 최종적 승자가 된 것 같았지만, 바로 그 ‘자기를 도와줄 우군이 모두 사라진 상황’ 때문에 그는 말년을 외세에게 시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그는 일본군의 힘을 빌려 동학농민군을 진압함으로써 민족의 내부적 역량까지 모두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철저하게 내부의 모든 것을 없애 나가면서 오로지 외부의 것을 이용해서 조선과 자신의 영화를 이루려 한 것이다.

내부에서 힘을 찾지 않고 외부에서만 힘을 찾은 자의 비참한 말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와이프 보이'의 이미지를 벗기면 고종에게서 보다 더 무서운 이미지가 나타나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가 정말로 와이프 보이였다면 그나마 그의 실패는 덜 참혹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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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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