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4회

등록 2007.07.12 09:18수정 2007.07.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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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공했습니다. 아주 깨끗하게…바랬던 것 이상의 결과를 얻으셨습니다.”

“으음…….”


추태감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이제야 용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나 상만천이나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이 단지 계획했던 데로 움직여 그렇게 된 것일까? 단지 운이 좋아 일이 그렇게 풀린 것일까?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란 말이지?”

추태감은 신음처럼 입술 사이로 말을 흘렸다. 용추의 말은 분명했다. 자신들이 노리는 있는 것을 누군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성과를 얻은 것 같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 인물은 함곡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용추는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자책과도 같은, 한편으로는 탄식과도 같은 어조였다. 추태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는 용추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만약 중원에 자신의 생각까지도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용추와 함곡 뿐이다. 그리고 용추가 함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네는 함곡을 두려워하고 있군.”

어쩌면 용추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허나 용추는 기분 나빠하는 표정이라든가, 반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추태감의 어조는 부드러워 마치 동병상린의 느낌을 갖게 하기도 했지만 용추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겉치레의 명예나 자존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입니다. 저는 그를 두려워합니다. 그의 박학다식한 지식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의 번뜩이는 지모(智謀)를 두려워합니다. 다만 인내란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는 그보다 참을성이 많습니다.”

똑똑하다고 천하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많다고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하나 상대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 살려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승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다.

똑똑한 것으로만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또는 무공의 고하여부로 결정된다면… 그리고 지금 가진 것만으로 승부가 결정된다면 아예 승부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간혹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승부도 의외의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열은 객관적인 예측을 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적은 부분이라도 그 이면(裏面)이 존재하고, 가끔 그것이 괴물처럼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 느끼게 되고 때로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

용추 역시 함곡과 더불어 세간의 인정을 받는 지자(智者)다. 함곡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함곡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결코 감추려하지 않고 두려워는 하되 저열한 패배의식이나 비겁한 시기심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당당한 태도다.

“태감께서는 여기에 반드시 들어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태감의 심복이었던 신태감께서 살아 있었다면 말입니다.”

그 말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상황에 따라 만반의 준비를 하기도 했지만 신태감이 살아있었다면 자신은 굳이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헌데 신태감은 바로 들어오는 날 살해되었다.

“반면에 태감께서 꿈꾸는 대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태감께서 죽으면 태감께서 반드시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재보도 마찬가지였겠지.”

이제야 서서히 감이 잡히고 상대의 음모가 구체화되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했지만 모든 상황이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하게 상대가 쳐놓은 그물에 점점 깊이 들어가는 결과가 되었다.

“물론입니다. 특히 철담어른의 죽음은 이곳에 직접 들어오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미 서로의 의도나 목적은 알고 있는 터. 그것 가지고 굳이 들추어내거나 따질 필요는 없다. 모든 상황이 이렇듯 겉으로는 예외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추산관 태감은 용추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에 무거운 쇳덩이가 올려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일들을 누군가가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녕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다. 더구나 이미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이미 계획한데로 실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본관이 어떻게 하면 되겠나?”

추태감은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고, 그에 따라 급박한 순간에서도 망설이지 않는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함곡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용추다. 그렇다면 함곡을 상대하는 일은 용추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완벽한 동조와 협력입니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않고 완전히 한 편이 되는 것… 이곳을 나갈 때까지 만이라도 완벽한 한 몸이 되는 것만이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허나 이미 가는 길이 다르다. 아니 가는 길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를 두고 누가 차지하느냐 경쟁하고 있는 입장이다. 아마 둘 중의 하나가 쓰러진다면 남은 자가 그것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상만천이 자신에게 등을 보인다면 그 어떠한 비난과 욕설을 퍼붓는다 해도 솔직히 칼을 꽂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상만천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런 관계 속에서 완벽한 한 몸이 될 수 있을까?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네는… 본관을 위해 일할 마음이 없나?”

추태감이 얼굴을 심각하게 굳히며 물었다. 이런 시기에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허나 추태감의 속내를 드러낸 말이기도 했다. 용추는 정말 필요한 인재다.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인물이다. 더구나 용추가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면 상만천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하는 망외의 소득도 챙길 수 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미세하나마 추태감의 눈 깊숙한 곳에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얻지 못한다면 죽이는 것이 상책이다. 허나 죽이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불확실했다. 상만천까지 완벽하게 적으로 돌리면 정말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질는지 모른다.

추태감은 갑자기 찾아온 어색한 상황을 혈서를 집어 들어 보는 것으로 애써 외면했다. 이미 혈서 안의 인물들은 모두 뇌리 속에 있다.

“이 자가 함곡과 이 모든 계획을 세운 주모자겠지?”

이름이 없는 장인(掌印)을 가리킴이다. 용추는 등에서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린 사실을 깨달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보주가 이 모든 사건의 주모자 일 것이란 추측은 잠시 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주의 장인은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아서 인가?”

“그렇습니다. 다만 아직도 이 인물이 보주의 측근이라면 보주의 지시에 움직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허면 이 자가 누군가?”

추태감이 묘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천지 #추리무협소설 #이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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