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5회

등록 2007.07.13 09:00수정 2007.07.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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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추태감은 또 다시 정색을 하며 꾸짖듯 말했다.


“완벽한 동조와 협력이 되려면 일단 서로를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하네. 그 정도는 서로에 대한 예의 아니겠나?”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있지 않는다는 질책이다. 용추는 두 손을 모으며 공손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다면 분명 말씀드렸을 겁니다. 이 좁은 운중보 안에서 여기에 있는 자들을 움직일 인물이라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소생은 이 인물이 누군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다. 협상에 있어서 성공여부는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추태감이 잠시 용추의 진심을 확인하려는 듯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혈맹은 이제 시작되었다고 재보에게 전하게. 단 재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순간 끝난다고 덧붙이게….”


어차피 예상했던 바다. 상만천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이의가 있을 리 없다. 단서 역시 상만천이 바라던 바다.

“이 자에 대해서는 중의에게 물어봐. 중의가 치료했던 인물 중에 하나라면 그는 반드시 기억해 낼 테니까….”


그 순간 용추는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치고 싶어졌다.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장인이 주인을 알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 중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군. 본관의 생각은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확실히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해.”

“……?”

“이제 상대를 안 이상 도망을 칠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밀어버릴 것인지 말이야. 어느 것을 선택하든 중요한 것은 일시에 우리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지. 밀어버리는 것 같이 보이다가 퇴로를 만들거나, 퇴로를 만들면서 밀어버리는 힘의 분산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야.”

혈맹이라면 쥐구멍을 파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정했으면 가진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한다면’이란 가정 속에 자기만의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것을 남기거나 분산시키는 짓 따위는 버리라는 말이다.

추산관 태감은 확실히 놀라운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한 정보력이 있다는 의미도 되었지만 상만천의 성격을 매우 잘 아는 인물이기도 했고, 또한 작금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모든 것은 태감과 함께 결정할 것이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물론 태감께서도 역시 똑같은 약속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약속하지.”

추태감은 선선히 동의했다. 그는 비록 불알 없는 환관이지만 그릇이 컸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능효봉은 보주를 보자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올렸다. 보주 역시 드물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받았다.

“이제 때가 되어 온 것이냐?”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자식이나 제자를 대하듯 인자한 말투였다.

“아직 하루 남았습니다. 그리고 소생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능효봉의 태도는 다른 때와 달리 매우 진중했다. 항상 장난기 비슷한 냉소적인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없는 게냐? 아니면 목적을 잊어버린 게냐?”

보주가 말의 의미와는 달리 여전히 인자한 목소리로 물으면서 자리에 앉자 풍철한과 설중행 역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저 녀석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그냥 호기심에 온 것뿐입니다. 그리고 저 녀석이 있는 자리에서 소생이 어르신께 한 약속을 이행했음을 확인하는 기회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풍대협까지 와 있다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능효봉은 눈길로 설중행을 가리키며 설중행 옆에 앉았다. 보주의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뜻은 분명했다. 지금은 보주와 한 과거의 거래에서 자신의 약속은 이행했다는 것과 보주에게 받아야 할 채권을 받을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

“녀석… 노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구나. 눈빛도 살아있고….”

시비가 다가와 찻잔을 데우고 찻물을 따랐다.

“모두 어르신의 덕분입니다. 소생은 어르신께 실망을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설중행과 풍철한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태도와는 달리 말은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히 매우 놀란 것은 보주와 능효봉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매우 가까운 사이로 말이다. 오랜 동안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에도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할 태도와 눈빛, 그리고 말투를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궁금했다.

‘빌어먹을… 능형까지 보주가 안배한 인물이었던가?’

설중행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보주는 자신과 무슨 관계일까? 정말 자신의 부친이라도 되는 것일까? 자신을 버려둔 듯 하면서도 모든 것을 안배해 준 이유는 무엇일까? 설중행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흡….”

무지하게 뜨거웠다. 입 안에 온통 데인 것 같았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억지로 그냥 삼켜버렸다.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화끈한 느낌까지 들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지만 세 사람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허허헛….”
“하하….”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설중행이야 죽을 맛이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아주 애매한 분위기를 바꾸는데 충분했다.

“네 녀석은 가끔 엉뚱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풍철한이 놀리듯 말하자 설중행이 곁눈으로 풍철한을 노려보았다.

“역시 재미있군… 노부는 이렇게 자네들 같이 젊은 사람들하고의 대화가 재미있다네. 물론 자네들이야 노부 같은 노인네와 같이 앉아있는 것이 좋을 리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지.”

부르면 오지 않을 제자들도 없겠지만 홀로 있는 것이 좋아 그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노부는 오늘 저녁 오랜 만에 모두 불러 식사라도 할까 한다네. 아무래도 내일은 아이들과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지. 자네들도 참석하겠나?”

“소생들이 그런 자리에 낄 수 있겠습니까?”

풍철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보주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좋은 기회이지만 이미 저녁에 따님께서 소생들을 초대한 선약이 있는지라….”

“그 아이가? 호오… 운무소축으로 오라 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모두 저 녀석 때문 같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풍철한이 눈짓으로 설중행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 아이까지 부르려 했는데…. 부르지 말아야겠구먼….”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가 아닌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면서도 보주의 얼굴에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주마저도 우슬이 왜 이들을 불러들이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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