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에서 만난 무례한 중국 외교관

등록 2007.07.16 13:52수정 2007.07.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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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7월 14일 자금성 내부의 모습. 마주 보이는 것이 천안문이다.

7월 14일 자금성 내부의 모습. 마주 보이는 것이 천안문이다. ⓒ 김종성


7월 14일, 주말을 이용하여 베이징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자금성(고궁, 황궁)을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중국 각지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여행자들로 자금성 내외는 북적거리고 있었다.

자금성 앞에 있는 모주석 기념관(모택동 기념관)과 중국국가박물관 등은 물론 자금성 내의 주요 전각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형 공사는 거대한 인파에 더해 자금성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자금성뿐만 아니라 베이징대학 등 시내 곳곳에서 올림픽에 대비한 대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베이징은 '공사 중'이라 할 수 있다.

동서 길이 약 750미터, 남북 길이 약 1000미터인 넓고 넓은 자금성은 온 종일 걸어 다녀도 다 구경하기 힘든 곳이다. 아마 3, 4일은 투자해야 자금성 내부의 주요 전각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음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금성 내부를 다 돌아다니려면 다리 근육이 튼튼해야 한다.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구두를 신고 몇 시간 정도 다니다 보면, 서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다리가 아파서 자주 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7월의 뜨거운 햇빛과 아픈 다리에 지친 몸을 이끌고 자금성 보화전을 지나 군기처에 도달하면, 그 안에 전시된 여러 초상화 속에서 매우 낯익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구한말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바로 원세개(위안스카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세기 중국의 대외관계를 연구하면서 원세개에 대해 가지게 된 인상은 한마디로 '무례함'이다. 초상화 속에서는 통통하고 약간 순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이지만, 원세개가 국제무대에 명함을 내민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동아시아 외교가에서 그는 무례한 인물로 통했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예'는 차별적 질서를 의미한다. 그 역량에 따라 각 개인에게 차별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도출하는 것이 바로 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대우를 받으려 하거나 혹은 파워를 행사하려는 것은 일종의 무례가 되는 것이다. 19세기말의 중국 외교관인 원세개도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본래 책과 별로 친하지 않은데다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상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서 조선 현지의 청나라 대표자 자리에 오른 원세개는 고종 임금 앞에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예의범절이 극도로 '꽝'인 인물이었다.

a 군기처 벽면에 전시된 원세개의 초상화.

군기처 벽면에 전시된 원세개의 초상화. ⓒ 김종성

물론 원세개의 무례는 그의 후견인인 북양대신 이홍장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감독(이홍장)의 작전(조선 국왕의 기를 죽이라)을 그렇게 잘 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본래 무례한 자질을 타고 난 '선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원세개의 무례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하나는 사인(私人) 원세개의 무례이고 또 하나는 공인(公人) 원세개의 무례다.

여기서 사인 원세개의 무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 듯하다. 왜냐하면, 개인적 예의범절을 논하게 되면 그 개인의 인물 됨됨이뿐만 아니라 그 부모의 무능함까지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데, 원세개 집안의 가풍 문제는 현대 한국인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공인 원세개의 무례함일 것이다.

공인 원세개의 무례함이라는 것은 조선 현지의 중국 대표자로서 그가 저지른 무례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청 정부의 국제적 무례함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당시 청 정부의 대(對)조선 외교가 어떤 면에서 무례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민족 왕조에 대해 사상 최초로 내정·외교 간섭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 폐위 음모까지 시도했다는 점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홍장-원세개 라인을 통한 청 정부의 대조선 외교는 그 정도가 매우 지나친 것이었다.

정도가 지나쳤다는 것은 그 양상이 과도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청나라의객관적 역량을 초과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예라는 것은 각 주체의 객관적 역량에 따라 차별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 파워를 행사하려고 할 경우, 그것은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무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조선 간섭정책의 출발점인 1879년 8월 21일자 광서제의 유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중국이 한민족 왕조에 대해 간섭정책을 전개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 이전의 한중관계에서 한민족이 중국에 대해 대체로 형식적 하위에 있었다고는 해도, 양국관계는 실질적으로는 상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관계였다. 전통시대에 중국이 한민족의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한민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국의 국력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시대의 한중관계는 상호 자율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1882~1894년 시기의 간섭정책이 일제식민당국 등에 의해 확대 해석되어 한국인들의 뇌리에 인식되는 바람에, 한국인들은 과거 한민족이 중국 앞에서 자율성을 상실한 채로 살았다는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흥미를 가질 만하다. 서양이 동아시아를 침략하지 않았을 때에는 한민족에 대해 간섭을 감행하지 못한 중국이 왜 하필이면 서양이 들어온 이후에 처음으로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정상적인 경우라면, 서세동점 이전에 중국이 한민족에 대해 간섭을 행하고 서세동점 이후에는 중국이 서양의 기세에 눌려 한민족에 대한 간섭을 포기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중관계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이 동아시아를 침략한 서세동점 이후에 중국이 한민족에 대해 최초의 간섭정책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말 속에 문제의 포인트가 담겨 있다. 바로 서양의 힘을 바탕으로 중국이 한민족의 내정·외교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편전쟁(1840년) 이후로 약 20년간 서양은 중국침탈을 위해 대(對)중국 공세를 강화했다. 그런데 대체로 1860년대부터 서양의 중국침탈은 그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거기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에서 나타난 중국 민중의 역량에 서양열강이 놀란 것이 하나의 이유라면, 세계 양대 최강인 러시아와 영국이 1860년대부터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정책을 추구한 것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이유에 논의를 국한시키기로 한다.

1860년 중국-러시아 베이징조약(흔히 '북경조약') 이후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었다.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영국-러시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그 틈을 활용하여 청나라-일본-프랑스-독일-미국 등이 영향력을 강화하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그러니까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1부 리그(영·러)와 2부 리그(청·일·프·독·미)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도한 상호대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영국·러시아는 조선반도가 상대국의 단독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선을 보호하려면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만들어야 했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느 나라도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특정 국가를 대리인으로 삼아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상대국이 영향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1880년대 이후 영·러가 선택한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이다. '믿을 만한 그리고 만만한 대리인'을 2부 리그에서 뽑아 조선반도에 배치함으로써, 1부 리그 라이벌이나 여타의 2부 리그 국가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a 자금성 내부의 모습. 주요 전각에서 올림픽에 대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자금성 내부의 모습. 주요 전각에서 올림픽에 대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김종성

1880년대 초반에 그 같은 영·러의 필요에 부응할 만한 2부 리그 국가는 청나라와 일본이었다. 그런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1884년)을 거치면서 청나라가 일본에 대해 우위를 장악하게 되자, 영국과 러시아는 청나라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지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영국·러시아의 낙점을 받은 것이다.

그 실례로, 역사학자 권석봉의 논문인 '이홍장의 대조선 열국 입약권도책'이라는 논문에 의하면, 앞서 소개한 1879년 8월 21일자 광서제의 유지 이전에 청국주재 영국공사 웨이드가 청 정부에 대해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실시하여 서양 각국을 조선에 끌어들이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청나라를 매개로 서양 여러 나라를 조선에 끌어들임으로써 라이벌 러시아가 조선에서 단독 지배력을 보유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 러시아 역시 영국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청나라의 대조선 간섭을 지지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청나라를 지지한 데에는 그 같은 동상이몽이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와의 경쟁(임오군란·갑신정변)에서 밀린 일본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영국·러시아 같은 세계 최강이 조선을 장악하는 것보다는 청나라가 임시 장악하는 것이 훗날 재기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갑신정변 이후로는 일본도 청나라의 대조선 간섭을 잠정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 등도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양열강이 청나라의 대조선 간섭을 통해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전략을 갖고 있었기에, 청나라는 1882~1894년의 12년 동안 사상 최초로 한민족의 내정·외교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청나라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양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는 '안분지족'을 몰랐다. 단순히 세력균형자의 역할에 만족한 게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군주를 세우고(고종 폐위음모) 조선을 아예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려 하는 등 자신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꿈꾸었다. 원세개의 과도한 행동은 바로 그 같은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양의 힘에 기반하여 대조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청나라가 조선에서 팍스 시니카를 건설하려 하자, 서양열강의 눈에는 그런 청나라의 행동이 '오버액션'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는 무례한 행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청국주재 미국공사 영(Young)이나 청국주재 일본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은 청나라의 과도한 행동이 결국에는 화를 부를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하였다.

각국 외교관들의 예견대로, 결국 청나라의 과도한 행동은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한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파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고 그것은 결국 청일전쟁(1894년)으로 청나라가 대조선 영향력을 상실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청나라의 무례함에 서양열강이 등을 돌리자, 청나라의 대조선 영향력이 일시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실제로, 청일전쟁 직전에 서양열강이 청나라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일본이 청일전쟁을 쉽게 도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의 개전은 국제사회의 묵인 하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국이 어떤 조건 하에서 대조선 간섭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청 정부, 이홍장, 원세개의 과도한 행동이 결국에는 청나라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청나라의 멸망을 자초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되고 만 것이다.

자금성 군기처에 걸려 있는 원세개의 초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전통시대든 현대든 간에 자국의 국력 이상으로 위세를 보이려 하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반드시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국의 국력만큼의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외교관들도 문제이지만, 자국의 국력 이상으로 과도한 자신감을 갖는 외교관들도 문제일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쩔쩔매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언제나 과도한 우월감을 갖고 있는 서울 주재 중국 외교관들에게 원세개의 사례는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한중관계는 본질적으로 상호 자율적인 관계였으며 그 예외(1882~1894년)는 서양의 지원 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의 모델이 어떤 것인가를 시사하는 대목일 것이다.

동아시아 역학구조상 중국과 한반도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향후 미국이 한반도에서 나간 뒤에 중국이 미국 흉내를 내려 한다면 이는 중국의 외교적 실패를 자초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올림픽에 대비해 베이징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마당에, 중국 외교관들의 한국 인식도 이번 기회에 대형 수리를 하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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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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