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는 버리지 않고 새장가 들고 싶다

[태종 이방원 125]임금님의 결혼식

등록 2007.07.18 14:40수정 2007.07.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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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이 그립다

임금의 어가 행렬이 흥인문 밖에 이르자 도성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왔다. 임금이 존경스럽고 위대해서가 아니었다. '개성재천도설'로 뒤숭숭하던 소문을 잠재워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던 한양의 집값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태종의 환궁으로 한양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성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은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정비(靜妃) 민씨 때문이다. 민무구 사건으로 싸늘하기만 하던 정비의 시선이 개성을 다녀오면 회복되리라 기대했었다. 민무휼 민무회에게 직첩을 제수한다는 깜짝 선물도 준비했다. 그러나 정비는 나아진 것이 없었다. 뜨거웠던 몸은 차갑게 식어만 갔고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민무휼 민무회에게 관직을 내려주고자 한다는 의중을 내비쳤을 때 반대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꺼져가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한사코 반대하는 의견을 물리치고 통 크게 관직을 내렸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예봉을 꺾기 위하여 반대 무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과 같은 인사이동에 민무휼 형제의 이름을 넣었다. 임금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비가 몰라주고 있었다. 나름으로 성의의 뜻을 표하는 인사이동이었는데 그걸 몰라준다니 정비가 야속했다. 울분을 삼키며 야인생활 하던 옛날이 그리웠다. 자신을 위로하고 감싸주던 여인은 부드러웠고 상냥했으며 방사는 불같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정비는 그때 그 여인이 아니었다. 물론 원인은 자신이 제공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동생을 죽인 지아비를 어떻게? 무슨 감정으로? 얼마만큼 뜨겁게 사랑하리오? 라고 말없이 항변하는 정비의 속내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한 여자의 지아비만은 아니지 않은가? 만백성의 어버이가 아닌가. 지아비도 사랑하고 임금도 사랑하는 그런 여자이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정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만 같았다.

여러 여자를 사랑하고 싶은 남자와 독점하고 싶은 여자


임금을 떠나 한 사나이로서 여자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두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데 여자는 왜 독점하려고만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여자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고 뇌를 열어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미 왕자를 생산한 효빈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해도 치켜 올라간 눈 꼬리에서 차가운 시선이 뿜어져 나올 때는 소름마저 끼쳤다.

한양에 돌아온 태종은 정비가 야속을 넘어 괘씸했다. 대소신료들이 퇴궐한 늦은 밤. 태종은 지신사(知申事) 김여지를 소침(小寢)으로 불렀다. 임금이 소침에 머무른다는 것은 요새말로 풀이하면 왕비와 부부관계를 끊고 각방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부부는 사람의 대륜인데 지금 정비가 민무구 일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품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하였다. 지난날에 내가 창병(瘡病)이 몹시 크게 났을 때 가만히 여시(女侍)와 결탁하여 병세를 엿보고 이무와 더불어 불궤를 음모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민무구 죄의 출발이었다. 정비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으니 내가 폐출하여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임을 생각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 - <태종실록>

"정비는 이미 정적(正嫡)이고 나라의 국모이며 또 자손이 많으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원컨대, 깊이 생각하소서."

"나도 또한 가볍게 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정비를 대신하여 내사(內事)를 이끌어 갈 만 한 자를 선택하여 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지신사는 과인이 하는 말을 기초하여 의정부에 내려라."

태종은 지신사 김여지에게 임금의 혼인문제를 기초(起草)하라 명했다.

"부인이 남편의 집을 안으로 하고 부모를 밖으로 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의리이다. 정비가 민무구의 원망을 끼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하여 폐출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예전 정리를 생각하여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다리겠다. 정부는 훈구(勳舊)의 집과 충의(忠義)의 가문에 내사를 잘 보살필 수 있는 여자를 선택하여 아뢰라."

조강지처는 내치지 않겠으나 새장가 들고 싶다

왕비 민씨를 내치고 싶으나 옛정을 생각하여 내치는 것은 보류하고 새 여자를 들이겠다는 것이다. 지신사 김여지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한 태종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륜, 우정승(右政丞) 조영무 그리고 예조판서를 불렀다.

"지금 즉시 가례색을 설치하도록 하라."

정승과 판서는 어리둥절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엇들을 하느냐? 가례색을 설치하라고 하지 않았드냐?"

"예,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륜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종의 불호령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예조는 비빈(妃嬪)제도를 상고하라."

중국의 황제는 126명의 여자를 거느릴 수 있고 변방의 왕은 10명이다

"가례(嘉禮)는 내치(內治)를 바르게 해서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후사(後嗣)를 잇자는 것이니 신중히 하여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예기(禮記)에 천자(天子)의 후(后)는 6궁(宮),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어처(御妻)를 세워 천하(天下)의 내치(內治)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상고하면 '제후(諸侯)는 한 번에 아홉 여자에게 장가드는데 적부인(嫡夫人)이 행(行)하면 질제(姪娣)가 따른다. 그런즉, 부인(夫人)이 1이고 잉(媵)이 2이고 질제(姪娣)가 6이라' 하였습니다. 그 칭호는 세부를 빈(嬪)으로 하고 처를 잉(媵)으로 하여 후세에 법을 삼으면 법도에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천자는 126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제후 즉, 왕은 10명의 여자를 거느릴 수 있다는 뜻이다. 태종은 흡족했다.

"1빈(嬪) 2잉(媵)으로 제도를 삼도록 하라."

처첩제도가 아니라 빈잉(嬪媵)제도가 순간에 확정되었다. 태종의 새장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의정(領議政) 하륜, 좌정승(左政丞) 성석린, 우정승(右政丞) 조영무를 도제조(都提調)로 하는 가례색(嘉禮色)이 설치되었다. 가례색은 왕실의 혼인을 전담하는 임시기구다.
#가례색 #조강지처 #빈 #잉 #비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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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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