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8회

등록 2007.07.19 08:09수정 2007.07.19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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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응변치고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고, 더구나 몸이 빠르기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움직임이었지만 반장(半丈) 안에서 이루어진 갑작스런 기습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사사삭-----!

이미 늦었다. 세 개의 칼날이 이미 아홉 개로 불어나고 그것은 빽빽한 검막을 형성하며 곽정흠의 몸을 난자했다. 몇 줄기 핏물이 허공에 호선을 그으며 뿜어졌다. 아무리 몸이 빠른 곽정흠이라도 이렇듯 방비나 경계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격을 받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털썩----!

곽정흠의 몸이 일장 밖 땅바닥에 떨어져 내리며 꿈틀거렸다. 삼수검(三手劍)이란 엽락명의 명호가 보여주듯 그의 검은 언제나 세 개였고, 그것은 곧 아홉 개로 불어난다. 일단 아홉 개의 칼날이 허공을 덮으면 상대는 피할 길이 없어진다. 엽락명이 십성의 공력을 사용해 펼치면 아마 적어도 열여덟 개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으… 으… 네… 놈이… 왜…?”

내동댕이쳐진 후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는 곽정흠은 정말 한순간에 목불인견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전신 어디 성한 데가 없었다. 옷자락은 여기저기 나풀거리고 피가 찐득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깊고 얕은 검상이 무수하게 전신을 덮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상체를 일으키는 곽정흠의 가슴에는 종이장처럼 얇은 연검이 닿아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파고들 것이었다.


“그동안 수고하시었소. 곽형에게 이러는 것은 나도 싫지만 내가 살려면 어찌하겠소?”

힘겹게 숨을 내쉬는 곽정흠이 가까스로 상체를 세운 채 원망어린 눈빛을 던졌다.


“지금까지… 나는… 네놈에게 서운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그 말에 엽락명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불편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곽정흠과는 같이 경비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만큼 할 말 못할 말 다하는 절친한 관계였다. 지금도 사실 곽정흠이 미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나 역시 곽형에게 이러고 싶지 않소. 미안하오.”

들고 있는 연검을 그냥 찔러 넣으면 만사가 끝날 터였다. 곽정흠이 피를 뱉어내며 다시 물었다.

“누…군가? 나를… 죽이라고… 한… 자가…?”

엽락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모르시고 죽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 분 역시 곽형을 미워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곽형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죽이라 하시는 것뿐이오.”

“그 분…? 흐흐… 무엇…이… 너를….”

곽정흠은 힘겹게 호흡을 할 정도로 중상을 입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엽락명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엽락명 역시 그냥 찔러 넣을 순간을 잡지 못했고, 이러한 시간이 엽락명에게도 괴로운지 잠시 탄식을 내뱉었다.

“휴우… 그저 소제를 원망하시오.”

이런 시간은 되도록 줄이는 것이 좋다. 어차피 손을 쓰기로 했으면 마무리 짓는 것이 괴로움을 더는 것이다. 말과 함께 엽락명은 손을 앞으로 밀었다. 얇은 연검은 살갗을 파고들며 뼈에 닿는 듯한 감촉을 주었다.

허나 그 순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가슴을 파고드는 검날을 보면서 곽정흠의 몸이 옆으로 살짝 돌려졌다. 그것은 검날이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늘어진 곽정흠의 오른발이 엽락명의 낭심을 노리며 차 올려졌다.

“헙…!”

낭심은 사내들에게 있어 무의식중에 보호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부위다. 이 돌연한 사태에 엽락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발자국 물러섰는데 지금까지 다 죽어가는 듯 보였던 곽정흠의 신형이 쾌속하게 옆으로 튕기며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는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것이어서 돌연한 사태에 잠시 주춤했던 엽락명은 아연실색했다. 곽정흠의 몸이 빠르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정말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허나 그는 더 이상 경탄할 사이도 없이 곧 바로 신형을 날려 뒤쫓았다.

“빌어먹을…!”

백양각을 벗어나 꽤 멀리 쫓아갔지만 이미 곽정흠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실수였다. 아니 실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상황은 엽락명이 아니라 그 누가 옆에 있었더라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돌발적인 움직임이었다. 곽정흠이란 인물을 모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검을 너무 믿은 탓도 있었다. 또한 다소 미안하다는 사치스런 감정에 잠시 방심한 탓도 있었다. 거의 죽을 것 같이 보였지만 곽정흠이 그 어느 누구보다 몸이 빠른 자라는 사실에 경각심을 풀지 말았어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습을 당한 그는 엽락명의 검을 맞으면서도 보기와는 달리 치명적인 부상을 최소화한 것이다. 상처는 무수하게 났지만 치명적인 사혈이나 극심한 중상을 피했으면서 상대에게는 곧 숨이 넘어갈 정도의 중상을 입은 것으로 완전히 믿게 만들고는 기회를 노린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엽락명의 연검 끝에는 세 치 정도 깊이의 혈흔이 묻어있었다. 그것은 분명 곽정흠의 몸에 자신의 연검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사람의 몸에 검이 세 치 정도 박히면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가슴을 꿰뚫었다면 분명 죽어야 마땅하다.

헌데 그는 살았다. 그것은 곽정흠이 몸이 비틀리면서 옆으로 찔리게 만든 것이고, 뼈에 닿는 느낌은 갈비뼈와 부닥치면서 그 위를 찌르게 만들어 그저 살갗을 파고들게 만들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발로 자신의 낭심을 걷어 차올린 것이고….

“낭패로군… 역시 호조수(虎爪手)였어… 바보같이 그런 자에게 인정을 베풀어 방심을 했다니….”

문제였다. 이러면 자신의 존재가 알려질 것이다. 지금까지 조그만 실마리도 주지 않으려 노력했던 자신의 존재가 알려질 것이 뻔했다. 일이 뒤틀렸다. 곽정흠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아직까지 믿고 있는 것은 곽정흠이 도망은 쳤지만 그리 적지 않은 부상은 입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감촉은 절대 작은 부상이 아니었다.

“반 시진 내에 반드시 찾아낸다….”

그는 다시 곽정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추적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당황스런 상황을 정리하고 그는 다시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했다. 그는 부상을 입었다. 적지 않은 중상이다. 살기 위해 마지막 힘까지 짜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중의어른에게 갔을 가능성도 있다. 중의어른이라면 자신의 얼굴을 보아 처리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과 함께 그 분을 모시는 그에게 갔다면, 그는 반드시 곽정흠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었다. 그리고 곽정흠이 좌등에게 가지 않았다면 그에게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곽정흠의 미세한 흔적과 핏자국이 눈에 더 잘 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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