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47회

등록 2007.08.08 08:28수정 2007.08.0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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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육파일방의 위세가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좌등과 진운청으로서는 벅찬 상대들이었다. 차라리 진운청이 없이 좌등 혼자라면 어떠한 방법을 강구하더라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진운청은 체계적으로 무공을 익힌 인물이 아니어서 경공에 있어서는 일류고수급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무공을 보며, 그리고 좌등의 무적신창대에 운 좋게 끼어서 무공의 기초를 배우고 자기만의 검을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검이 아닌 내공이나 잡공(雜功)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더구나 좌등으로서는 명색이 화산의 장문인인 자하진인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화산칠검은 화산이 전력을 기울여 키워낸 인물들임을 알고 있었던 터. 겨우 네 명뿐이라지만 자하진인과 화산칠검 중 네 명이라면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벅차다.

게다가 이미 광나한의 자결로 이성을 잃은 소림의 각원선사와 지광(智光)은 지금까지의 불법수행과는 달리 살계(殺戒)를 범하겠다는 듯 살벌한 표정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생각이 좌등의 뇌리를 스쳤다. 이미 상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았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이럴 때 일수록 성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일을 크게 그르칠 우려가 있다는 것쯤은 노련한 좌등이 모를 리 없다.

좌등은 일단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것은 자하진인의 위협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대주.....!”

진운청이 정말 예상치 못한 좌등의 행동에 억울함을 호소하듯 외쳤다. 이곳은 운중보다. 운중보 내에서 총관이라는 직책 아닌 직책을 가진 사람이 외부인물의 강압에 의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俊傑)이라고 했네. 자네도 앉게.....”

게다가 이런 말이라니....? 진운청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좌등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사람이다. 도대체 자신이 존경했던 좌등은 어디가고 이렇듯 비굴한 모습인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런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가?


일시적으로 화가 치밀기는 했지만 진운청은 더 이상 말없이 본래의 자리에 앉았다. 자신도 두 사람의 힘으로는 저들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란 정도는 이미 안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죽는다 해도 싸우는 것이 본래의 태도가 아닌가?

‘혹시 나 때문에....?’

좌등은 절대로 자신을 위해 굽힐 사람이 아니다. 죽음이나 고통이 두려워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주군이나 수하를 위해서는 굽힐 수 있는 사람이다.

허나 좌등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의 의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상대가 자신들을 파악하고 공격을 시작했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폭발음이 들린 것은 이제 아예 드러내 놓고 공격하겠다는 신호와 다름없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드잡이질을 한다 해도 얻을 것은 없었다. 소림이야 광나한의 죽음으로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당 역시 동창과의 관계로 보아 상대편에 섰음이 분명했다. 허나 화산의 태도는 아직까지 모호했다.

저 원숭이 같은 자하진인은 저울질을 하고 있을 터였다. 어느 쪽에 서야 화산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화산의 입지에 유리한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화산이 적극적으로 상대편에 섰다면 이런 시간을 주지도 않을 터였다.

더구나 자하진인은 화산으로 보면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낸 몇 안 되는 장문인 중 하나로 인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실속만 차리고 이기적이라고 욕을 들을지언정 화산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구파일방이니, 육파일방이니 하면서 한통속이라고는 했지만 화산으로서는 언제나 소림과 무당의 뒤에 있었다. 무림의 대접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산은 언제나 소림과 무당의 뒤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한번쯤 앞에 서고 싶었다. 소림과 무당을 제치고 육파일방의 앞에 놓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호기였다.

“역시 무적신창의 명성은 고절한 무공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구려.....”

화산의 자하진인이 안도의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숙일 때 숙일 줄 알아야 진정한 사내다. 역시 좌등은 일대 패주(覇主)로서의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자하진인은 내심 좌등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좌등에 대한 소문은 거짓이 아니다.

“아직 술이 남았는데 자리를 뜨는 것도 실례가 되겠다는 생각이오.”

좌등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자신과 진운청 둘이 화산과 소림을 붙잡고 있는 것도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이 일을 도모한 인물들의 능력을 믿었다. 특히 함곡이라면 이러한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

다만 일단 시간을 끌어보고, 술이 떨어지고 나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의도를 숨기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자하진인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화산사검 역시 긴장을 풀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하핫핫.... 아무럼..... 좌총관께서 화산의 옥로주(玉露酒)를 비우지 않고 떠나신다고 하니 얼마나 섭섭한지 몰랐소이다.”

알면서도 자하진인은 되도록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노력하는 듯 했다. 그러자 조금 전의 험악한 분위기에서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는 듯 했다. 좌등은 이제 자하진인의 내심을 얼핏 확신할 수 있었다. 소림의 각원선사와는 달리 화산이 맡은 역할은 좌등을 잡아두는 것이다. 반드시 드잡이 질 할 이유도 없고 더구나 서로 기분이 상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다.

육파일방 중 소림과 무당이 적극적으로 나서 동창을 돕는다 해도 화산은 언제나 뒤에 처져 있었고, 동창의 지원 역시 소림과 무당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하였다. 그것을 반전시킬 기회는 지금이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소림과 무당이 피를 흘릴 사이 자신들은 온전하게 전력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유리한 조건과 대우를 받을 것이었다. 자하진인은 그러한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선사께서는 곡차를 드시지 아니하니 다향 가득한 화산진향(華山陳香)이 어떻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선사께서 차를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 만나 뵈면 드리려고 조금 마련했소이다.”

상황이 반전되자 곤혹스러운 쪽은 소림의 각원선사였다.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본래대로 생각했던 드잡이 질을 하자고 충동질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이 거처의 주인은 화산이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노납은 밖에 나가 있겠소이다.”

애써 감추려고 했지만 노여움이 배어있는 목소리였다. 자하진인을 바라보는 눈에 서운함과 함께 노기가 서려있었다. 만약 그 눈빛을 말로 표현한다면 ‘이 약아빠진 원숭이 놈’이란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어찌 그러실 수가 있소이까? 청산이 있는 한 땔감을 걱정하지 말고....”

자하진인이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장황하게 말을 하려하자 각원선사가 불호를 터트리며 얼굴색을 바꾸었다. 이미 화산은 그 의도를 내보였고, 소림의 이름으로 화산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알겠소이다. 어찌 진인의 성의를 마다하리오. 유명한 화산진향을 맛보는 것도 좋겠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각원선사 역시 지광과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뭐하고 있는 게냐? 어서 차를 준비하지 않고....?”

짐짓 매봉검 황용을 나무라는 듯 말하는 자하진인의 호들갑은 화가 나도 화를 내지 못하게 하는 교묘한 화술이 있었다. 시비가 아닌 매봉검 황용으로 하여금 직접 소림의 인물들을 대접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같은 육파일방으로서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일깨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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