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50회

등록 2007.08.13 08:36수정 2007.08.1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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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그 때를 잊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왜 나는 친구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묵인하고 동조했을까? 오히려 왜 나는 친구들이 불행질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곳에 들어온 것일까?

그리고 왜 이제야 불현듯 그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이고, 스스로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가? 양심은 자신을 죄책감과 당혹감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친구들 앞에 사죄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용서를 빈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일까?


'아니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다......'

어차피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 테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차라리 친구들에게 솔직히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면 이리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친구들이 거절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때였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리고 전각의 진동이 느껴졌다. 저 폭발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모를 그가 아니다. 중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의 죄책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다고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더욱 나쁜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아니야..... 미안하네.... 친구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곧 미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구들의 모든 잔영을 지우려는 듯 그는 한 동안 고개를 흔들었다. 누군가 그를 보고 있었다면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대업이 이루어지는 날..... 자네들에게 용서를 빌겠네."

그는 갑자기 이미 식은 찻잔의 차를 훌쩍 마셔버리고는 다시 찻물을 따라 또 다시 단숨에 들이마셨다. 이미 식은 차는 약간 떫은맛까지 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는 친구들에게 느낀 죄책감과 당혹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선은 남은 두 친구를 만나는 일이었다. 어차피 추태감과 상만천이 움직인 이상 자신까지 나설 이유는 없었다. 당면한 문제는 남은 두 친구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운중이 나서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묵인이었다. 어쩌면 친구의 부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운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있음은 그가 친구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친구들과의 우정과 신의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초인적인 인내심과 친구에 대한 무한한 우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의로서는 운중의 우정을 이용해야 하는 처지였다. 끝까지 우정을 내세워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는 시기였다. 끊임없이 친구라는 명목으로 운중의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직까지 제자들과 같이 있을까?'

성곤을 만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운중을 만나는 일이었다. 뚜렷이 운중을 만나 무엇을 하려 하기보다는 어쨌든 만나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식은 찻물을 따라 마시고는 운중각으로 향했다.

---------------

운무소축과의 거리는 겨우 백여 장 미만이었다. 더 이상 생사림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운무소축으로 신형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아직도 희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운무소축의 잔해 속에서 여러 인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곳을 스쳐 지나며 추태감 앞으로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그들이 이용했던 연락책은 바로 청룡각의 시비로 배정되었다가 함곡이 빼내 간 당화와 홍교란 계집들이었습니다."

추태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자세하게 청룡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함곡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어찌했어...?"

"모두 처리했습니다. 홍교란 계집이 생사림 쪽으로 처박혀 시신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추태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존재 자체야 미미한 것들이지만 귀찮은 존재를 없애버렸다는 점에서는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용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어가 자꾸 그의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생사림......! 이것들이 무슨 장난을 쳐놓고 생사림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이지?"

추태감은 잠시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우려를 스스로 일깨우는 것도 되었지만 용추가 혹시나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우려에 대한 중얼거림이기도 했다. 하지만 용추는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공을 보며 물었다.

"비밀통로들은 모두 파악한 것이오?"

지공이 자세를 바로 세우며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이오. 땅 위는 모르지만 땅 아래에서는 나를 속이거나 당해낼 자는 없소. 주요부분들은 모두 파괴해 막아 놓았소."

"수고하시었소."

그리고는 상만천과 추태감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생사림 쪽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그 때 마침 아직도 연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운무소축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위 중 한 명이 팔을 들어 몇 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용추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상만천과 추태감이 벌써 걸음을 떼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점점 명백해 지고 있어서 뭔가 발견했다 하더라도 별다른 내용은 없겠지만 함곡일행이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그들이 빠져나간 구멍은 안채로 추정되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침상이 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우슬의 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침상이 놓여진 밑으로 짐작되는 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옆으로 비껴 놓아진 그 구멍의 덮개는 쇠로 만든 판이었고, 그 속은 뜻밖에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만들어져 있어 갑자기 만든 것이 아닌, 운무소축이 지어질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추가 추태감과 상만천을 바라보았다. 이 통로는 아마 생사림으로 연결되는 통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뒤쫓아 들어갈 수도 있지만 어떠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토목(土木)이나 기관(機關)에 있어서는 귀산노인의 경험을 능가할 사람은 없다. 자신은 물론 함곡마저도 귀산노인을 당해내지 못할 터였다.

"이 통로는 파괴시키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나중에라도 우슬이 이 통로를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허나 상만천이 고개를 끄떡이는데 반해 추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통로인지 확실히 파악한 후에 없애도 늦지 않을 같네."

용추에게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고는 지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용추가 뭐라 하기 전에 이미 지공은 손번에게 고갯짓을 하고는 그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용추가 따라 들어가는 손번에게 소리쳤다.

"확인만 하시오.... 이 속 어딘가에 함정이나 위험한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면 뒤도 돌아다보지 말고 빠져 나오시오."

혹시 모를 일이었다. 예상과 달리 이곳 지하에 또 다른 무엇이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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