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뒤의 비밀>
국일미디어
엄밀하게 말하자면, 찰리 챈은 탐정이 아니다.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 경찰청 소속의 형사이고,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하와이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성장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형사라는 신분과 중국계라는 핏줄, 찰리 챈은 겉으로 드러난 사항만 보더라도 다른 탐정들과는 구별되는 인물이다.
찰리 챈에게 독특한 점은 이것말고도 여러가지다. 대부분의 탐정은 가정에 관심이 없고 여자에게도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유명한 탐정들은 거의 모두 노총각인데다가 교만하고 자의식이 강하다. 겸손과도 거리가 멀고 언제어디서든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려고 한다.
찰리 챈은 이런 탐정의 특징과는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런 점은 모두 그가 중국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찰리 챈은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10명이 넘는 자식들을 키우고 있다.
그는 자신이 중국계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중국인 선조들의 미덕을 언제나 높이 칭찬한다. 가족을 중요시하고 지상천국은 가정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결혼에 관심없는 젊은이들에게는 결혼의 좋은 점을 설파하기도 한다. 보기드물게 가정적인 탐정이 바로 찰리 챈이다.
유능한 수사관이면서 가정적인 형사, 찰리 챈그리고 그는 사람을 만나면 깊이 고개숙여서 인사하고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없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는다.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때문인지 그는 항상 수사관의 덕목으로 '인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좋게 말하자면 예의바른 탐정, 나쁘게 말하자면 명탐정 특유의 카리스마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탐정으로서 이런 면은 단점일까? 아니면 장점일까? 이런 면들 때문인지 찰리 챈이 등장하는 시리즈에서, 찰리 챈의 활약은 그렇게 강렬하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다른 탐정들과는 다르다. 찰리 챈은 자신이 실수했던 경력들도 숨기지 않는다.
언변이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동작이 재빠르지도 않다. 오히려 조금 어눌하고 굼떠보이기까지 한다. 하와이에서 살기 시작한지 오래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의 말이나 행동이 느린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찰리 챈의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은 아니다. 뚱뚱하다는 점에서 눈에 띌수도 있겠다. 찰리 챈은 뚱뚱한 몸을 이끌고 범죄현장에서 여성처럼 세심한 걸음을 걷는다. 그의 볼은 아기처럼 통통하고 피부는 연한 갈색이고 검은 머리는 짧게 깎고 있다.
이렇게 수더분한 인상과 외모처럼, 찰리 챈의 수사과정도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는 함께 사건을 맡은 다른 사람이 분통을 터뜨릴만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왜 기다려야하는지 그 이유도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성질급한 백인 수사관은 찰리 챈에서 '당신의 패를 보이란 말야!'라고 화를 내지만 찰리 챈은 요지부동이다. 그때마다 찰리 챈은 '풀이 자라야 우유를 짤 수 있다' 같은 중국속담을 인용하면서 계속 기다린다.
이렇게 인내하면서 한편으로는 갖은 정황증거를 끌어모은다. 찰리 챈은 수사를 하면서 물적증거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고, 인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중국인임을 강조한다. 중국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심리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며,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찰리 챈도 수사과정에서 그런 방법에 의존한다. 그는 <중국 앵무새>에서 용의자가 왼손잡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커튼 뒤의 비밀>에서는 어떤 제안을 할때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반응을 미묘하게 포착한다. 이렇게 사소한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찰리 챈은 그때마다 중국 속담을 인용한다. '사람이 돌멩이에 발이 채여 넘어지지, 산에 채여 넘어지는 법은 없다'.
다른 탐정들과는 구별되는 찰리 챈의 매력첫 번째 작품인 <열쇠 없는 집>에서 그는 하와이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형사로 등장한다. 당연히 그 기간동안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하와이 전체에서 꽤나 높은 편이다. 하와이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도 그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유능한 수사관이 좁은 섬인 하와이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다.
찰리 챈은 어린 시절에 하와이 해변의 커다란 저택에서 사환으로 일을 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사환으로 일하면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몸에 밴 것인지도 모른다. 사환으로 일하면서 경찰대에 들어갔고 거기서 실적을 쌓아서 오늘의 위치에 이르게 된 인물이다. 그는 대륙을 동경하고 미국본토를 누비고 싶어하지만, 한편으로는 하와이를 그리워하고 그곳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사건의 무대도 하와이와 미국을 오락가락한다. <열쇠 없는 집>에서는 하와이의 평화롭고 낭만적인 정경을 묘사한다. 반면에 <중국 앵무새>에서는 엘도라도의 사막을 무대로 한다. <커튼 뒤의 비밀>에서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때마다 찰리 챈의 모습도 바뀐다. 당당한 형사의 모습일 때도 있고, 중국인 요리사로 변장하기도 하고 별다른 권한이 없는 객원형사신세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위치에 있건 간에 찰리 챈은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로 하나씩 단서를 맞추어나간다. 그리고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부치는 백인경찰에게 배짱좋게 대들기도 한다. '미치셨군요, 나리'라는 말을 던지면서.
찰리 챈을 만든 작가 얼 데어 비거스는 미국인이다. 그는 하와이에서 휴가를 갖던 도중에 찰리 챈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했다고 한다. 당시 호놀룰루 신문에 실린 실제 중국인 탐정에 관한 기사가 그에게 영감을 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해서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독특한 중국인 탐정이 등장하게 된다. 찰리 챈은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얼 데어 비거스가 발표한 찰리 챈 시리즈는 모두 6편이다. 이 6편 중에서 5편이 영화화되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TV, 만화에 이르기까지 찰리 챈을 주인공으로 한 많은 시리즈가 제작될 정도였다.
작가인 얼 데어 비거스가 <열쇠 없는 집>을 발표한 것은 1925년, 작가가 사망한 것은 1933년이다. 찰리 챈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작가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찰리 챈 시리즈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에 따르면 찰리 챈의 경력은 1950년까지 이어진다. 이미 70살 가까이 나이를 먹은 찰리 챈은 하와이의 집에서 조용히 남은 인생을 보낸다. 그의 주위에는 그가 사랑했던 많은 자식과 손주들이 있었다.
대륙을 누비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하와이의 집으로 돌아온 찰리 챈. 찰리 챈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인기를 끌었을까.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중국과 중국인은 낯선 존재였을지 모른다. 해박한 논리와 날카로운 말솜씨로 무장한 탐정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찰리 챈은 그곳에 툭 던져진 어눌한 이방인이었다. 미국의 미스터리 팬들은 이 탐정을 보면서, 자신들에게는 없는 어떤 면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것은 찰리 챈이 늘상 강조했던 겸손과 인내일수도 있고, 선문답하듯이 늘어놓던 중국속담일 수도 있다. 찰리 챈의 언행은 늘 조용하고 여유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때문에 찰리 챈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 인물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태산같았던 인물, 소위말하는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 찰리 챈이 사람들에게 던져줬던 매력도 아마 그 부분에 있을 것이다.
찰리 챈, 커튼 뒤의 비밀
얼 데어 비거스 지음, 김문유 옮김,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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