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장이 너무 많다>
동서문화사
미국의 추리작가 렉스 스타우트는 독특한 탐정을 만들려고 작정을 했던 것 같다. 탐정들 중에는 유난히 기인들이 많다. 렉스 스타우트가 만든 탐정 네로 울프도 분명히 이 기인들 축에 속할 만한 인물이다.
네로 울프는 우선 커다란 덩치가 인상적이다. 네로 울프는 한번도 체중계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울프의 몸무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작중 화자의 입을 통해서 그의 몸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울프의 몸무게는 250파운드에서 350파운드 사이라고 한다. kg으로 환산하면 대략 113kg에서 158kg 사이가 된다. 존 딕슨 카아가 만든 탐정 기드온 펠 박사처럼, 네로 울프도 그 엄청난 덩치로 사람을 압도하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기드온 펠 박사처럼 네로 울프도 맥주를 좋아한다. 펠 박사도 네로 울프도, 어쩌면 맥주를 좋아하는 습관 탓에 그렇게 뚱뚱하게 살이 쪘을지 모르겠다. 네로 울프는 매일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셔댄다. 하지만 자신의 음주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하루에 마시는 맥주의 양을 4.7리터로 줄이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우리나라의 마트에서 파는 커다란 페트병 맥주 하나의 양이 1.6리터다. 그러니까 울프의 경우에는 하루에 그런 페트병 3개씩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애주가가 본다면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런 분량의 맥주를 먹는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단순한 애주가가 아니라 이미 알콜 중독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음주습관과는 별개로, 울프의 머리회전은 대단히 빠르다. 울프가 생각하는 속도와 범위가 너무 빠르고 넓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둔하고 뚱뚱한 몸에 대한 보상작용으로 머리회전이 빨라졌을까?
렉스 스타우트가 창조한 탐정, 네로 울프 네로 울프가 등장하는 첫번째 작품은 1934년 작품인 <독사>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네로 울프가 어떤 인물인지 다방면에서 묘사하고 있다. 네로 울프는 뉴욕의 허드슨강 주변에 갈색 사암으로 만든 집에서 살고 있다. 아직 독신이고 저택에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3명의 고용인과 함께 살고 있다. 조수이자 비서 겸 매니저인 아치 굿윈, 요리사 프리츠, 난초를 돌보는 호스트먼이 그들이다.
이 중에서 실질적으로 네로 울프의 일을 도와주는 인물은 비서인 아치 굿윈이다. 네로 울프는 사건을 의뢰받아서 해결하고 그 보상을 받는 일종의 사립탐정이다. 그런데 네로 울프가 요구하는 보상액은 꽤 높은 편이다.
<챔피언 시저의 죽음>에서 울프는 사건을 위임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들려주는 비용으로 천 달러를 요구한다. <독사>에서는 사건해결의 정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1만 달러를 요구한다. 울프는 커다란 저택에서 차가운 맥주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수많은 난초를 재배하면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울프는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감자껍질을 벗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다'라고 말한다. 예술가의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뚱뚱한 체격 탓에 울프는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집밖으로 나갈 일이 있더라도 최대한 빨리 다시 집으로 들어오길 원한다. 혹시라도 장거리 여행을 할 일이 발생하면 울프와 굿윈 모두 엄청난 수고를 해야한다. 물론 이것은 울프의 커다란 덩치 탓이다.
<요리장이 너무 많다>에서 굿윈은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 나흘 동안의 기차여행을 위해서 트렁크 세 개, 여행용 가방 두 개를 챙겨간다. 울프의 뚱뚱한 몸을 데리고 기차의 칸막이 좌석으로 들어가는 것은 숫제 노동에 가깝다. 굿윈의 표현에 의하면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이집트에서 뉴욕으로 옮기는 것과 맞먹는 일이다.
이런 덩치 때문에 울프는 집안에서도 아주 긴급한 일이 아니면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앉아 있는다. 하루에 두차례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그리고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에는 어김없이 난초를 돌본다. 난초에 관한 울프의 지식과 경험은 수준급이다. 북대서양 박람회에 난초를 출품해서 상장과 메달을 휩쓸 정도가 된다.
이렇게 평상시 네로 울프와 그의 조수 굿윈의 생활은 무척 조용해보인다. 평상시에 굿윈은 다양한 잡무를 처리하고, 맥주와 구두약 같은 온갖 심부름을 한다. 첫 작품인 <독사>에서 굿윈은 7년째 울프와 함께 살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조용한 생활도 사건을 의뢰받으면 상황이 바뀐다. 네로 울프는 굿윈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굿윈은 울프의 손과 발이 되어서 동분서주한다. 언뜻보기에 네로 울프와 굿윈의 관계는 마치 셜록 홈즈와 와트슨의 관계처럼 보인다.
울프와 굿윈은 서로 마음속 깊이 신뢰한다. 그러면서도 울프는 사람들 앞에서 굿윈에게 짖굿은 장난을 하고, 굿윈은 울프에게 사표를 쓰겠다고 투덜댄다. 이 둘의 관계는 홈즈와 와트슨의 관계보다 좀 더 복잡한 면이 있다. 이것은 사건해결을 위해 이 두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울프와 굿윈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협력체제<독사>에서 이 두사람이 어떻게 2인3각 체제로 활동하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네로 울프는 머리고 굿윈은 손발이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네로 울프를 대신해서, 굿윈은 사건현장을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심문하고 필요한 사람을 울프의 사무실로 데려온다.
네로 울프는 점잖고 감정표현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울프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면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둘째손가락으로 뺨을 비비면 그것은 초조하게 귀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나 무릎을 두드리고 있으면 화가 나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울프와는 달리 굿윈은 무례한 행동을 보면 참지못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자신을 위협하는 경찰과도 정면으로 맞선다. 네로 울프가 소위말하는 안락의자탐정 스타일이라면, 굿윈은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체질이다. 작가 렉스 스타우트는 네로 울프와 아치 굿윈이라는 특이하면서도 흥미로운 명콤비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만큼, 울프의 사건수사 방식도 독특하다. 울프를 잘아는 한 교수는 그를 가리켜서 '악마의 계시를 받아 직관으로 범인을 잡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울프는 물적증거나 알리바이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혐의가 있는데도 알리바이를 들이대거든 그것을 허물어뜨리면 된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물적단서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울프는 몇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어떤 결론에 이른다. 이 과정은 직관적인 경우가 많다. 굿윈은 울프에게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아낸겁니까?'라고 묻지만, 울프의 대답은 그때마다 모호하기만 하다. 울프는 '예술가에게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네'라는 식의 표현만 늘어놓을 뿐이다.
그런 만큼 울프는 자신의 사건재구성을 그림에 비유한다.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살인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모두 거쳐서 살인자가 밝혀지고 사건이 재구성되면, 그때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팔듯이, 울프도 이렇게 구성된 완전한 정보를 누군가에게 판다. 꽤나 높은 가격을 붙여서.
네로 울프를 창조한 작가 렉스 스타우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무려 70여편이 넘는 네로 울프 시리즈를 발표했다. 1935년에 시작된 네로 울프 시리즈는 작가가 죽은 해인 1975년까지 이어진다. 무려 40년 동안 울프와 굿윈 콤비를 가지고 수많은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몇 편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울프의 후반기 작품들에 많은 호기심이 생긴다. 제아무리 침착하고 강철같았던 네로 울프라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는 법. 40년이 지난 후에 네로 울프는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비대한 몸집으로 맥주를 마시며 난초를 돌보고 있을까.
아가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탐정 에르큘 포아로를 상상해보자. 불세출의 탐정이었던 포아로도 말년에는 다리가 불편한 노인네가 되어서 휠체어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네로 울프의 육체도 그렇게 나약하게 변해갔을까. 운동도 하지않고 매일 맥주만 마시는 네로 울프의 건강을 생각해보면, 40년 동안 탐정생활을 했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다. 네로 울프가 해결한 수많은 사건보다도,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스테리에 가깝다.
요리장이 너무 많다
렉스 스타우트 지음, 김우탁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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