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지내던 과거의 한 장면을 만나는 것은 아픔일 수도 있고 반가움일 수도 있다. 과거 어떤 장면을 만나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나, 지난 일은 아픔마저도 대개 애잔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스스로세상학교>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입학한 두연(15, 가명)군이 서울 집에 갔다가 돌아오던 날. 갖고 있던 돈을 한 푼도 안 남기고 다 뭘 사먹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애잔한 그리움이 되어 버린 내 과거의 아픔을 만났다.
서울 남부터미널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짐작컨대 만 몇 천원이나 되는 돈을 다 군것질에 써 버리고 장계에 도착해서는 마을로 오는 버스비 800원이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오래된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상도동 장승백이 어느 독서실에서 생활하면서 입시공부를 할 때였다. 내 나이 열 아홉. 혈혈단신으로 모진 서울생활을 헤쳐 나가는데 학원비와 생활비 일체를 내 손으로 벌어야 했다. 양말 한 켤레 누구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다.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는 가정방문 시험지인 '일일공부'와 '장학교실'을 풀고, 묶고, 채점하고, 배달하고, 수금까지 해야했다. 저녁에 종로와 광화문 쪽에 있는 학원에 시간 맞춰 가기도 벅찼다. 용두동과 신설동을 거쳐 상도동 독서실로 옮긴 것은 오직 '직장' 때문이었다.
독서실 화장실이 꽁꽁 얼어버리면 여러 날 바꿔 신지 못한 양말에서 냄새가 진동을 해도 발은커녕 얼굴도 씻을 수 없는 날이 많았다. 목욕탕 주인 몰래 양말을 가지고 욕탕에 들어가 빨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식사는 라면과 자장이 주식
장승백이 시장에 들어가면 당시 250원 하는 자장집이 있었다. 어떤 날. 나는 앉은 자리에서 자장 꼽배기를 세 그릇이나 먹었다. 배가 고파 슬픈 날이 많았던 나는 이날은 배가 터질듯이 불러 슬펐다.
숨도 못 쉴 정도로 배는 부른데 독서실에 들어와 연탄 난로를 껴안고 담요 한 장으로 한밤 추위를 견디며 나는 그럴 수 없이 슬펐다. 동상이 걸려 퉁퉁 부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난로 옆에서 간질간질했다.
통금시간이 있었던 당시. 공부하던 학생들이 다들 집으로 들아가 자는 시간에 나무의자 너댓개를 붙여놓고 그 위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배가 불러서.
어떤 날은 시험지를 배달하면서 돈을 수금하는 족족 눈에 보이는 상점에 들어가 먹어댔다. 샌드위치, 초코우유, 곰보빵,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호빵, 만두호빵… 쉬지 않고 먹어댔다. 끝내 어느 외진 모퉁이 길에 꾸부리고 앉아 우웩우웩 토했다. 시험지 사무실에 단 한 푼도 수금한 돈을 내 놓을 수 없었던 나는 지독한 닥달과 욕설을 들어야 했다.
마을로 오는 막차에도 두연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장계로 차를 몰고 나가 읍내를 돌면서, 두연군 부모와 몇 차례 통화하면서, 아궁이에 혼자 타고있는 장작불을 걱정하면서, 밥상을 바로 들이겠다고 말씀 드려놓고는 그냥 나온 터라 아들이 안 보여 불안해 하고 있을 어머님을 떠올리며 애잔한 그리움 덩어리가 내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먼저 집에 와 있는 두연군을 만나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아궁이에 불을 같이 때면서 한 마디 했다.
"괜찮다. 야단맞을 짓은 사실 어른들이 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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