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인촨(银川)의 아침이 밝았다. 닝샤(宁夏) 회족 자치주의 수도 인촨은 구청(旧城)과 신청(新城)으로 나뉜다. 호텔을 비롯해 상업 기능은 여전히 구청에 있는데, 기차역은 신청에 있다. 거리가 꽤 멀어 여행객들에게는 다소 불편하다.
아침을 먹고 나니 호텔 옆 여행사가 문을 막 열었다. ‘서하 왕릉’과 ‘영화 세트장’을 가기로 하고 ‘란저우(兰州)’ 가는 기차 표를 동시에 구두로 예약했다. 짐을 싸서 호텔에 맡기고 다시 가니, ‘처퍄오페이창진장(车票非常紧张)’이라고 한다.
요즘 라싸 가는 여행객이 란저우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표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 예매 대행 요금으로 50위엔을 주면 책임지고 구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여행 투어까지 취소했다. 잠시 체크아웃 다녀온 사이 꿍꿍이가 생긴 것이다.
기차 역으로 가자니 택시비가 20위엔이니 멀기도 하고 아깝다. 여행가이드 책자인 ‘론니플래닛’ 보고 20분을 걸어서 찾아갔는데 예매처가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기차 역으로 갔다. 그런데, 란저우 행 티켓이 모두 ‘메이여우(没有)’라고 전광판이 반짝거린다. 낭패네.
택시 운전사 한 명이 달라붙는다. ‘어디 가냐?’ ‘오늘 밤 란저우, 표가 없네’ 했더니 관광은 안 가냐고 묻길래 ‘표를 사야 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표를 알아봐 주겠다며, 표 있으면 자기 택시로 이동하겠냐는 것이다.
‘그래, 좋지’ 했더니 여기저기 알아보고 오더니, ‘표 아직 있다’고 한다. 전광판 매진은 뭐냐? 했더니, 자기가 물어봤고 표가 많다고 한다. 이상하네. 하여간, 1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여유 있게 표를 예매했다. ‘팅수어처퍄오진장(听说车票紧张)’, 표가 거의 없다고 들었다고 하니, ‘쉐이수어더?(谁说的)’ ‘누가 그래?’ 뭐 그런 뜻이다. 그럼 그렇지.
덕분에 택시를 탔다. 150위엔에 하루 종일. 기차 역에서 서쪽으로 20분 정도 가니 ‘서하(西夏) 왕릉’이 나타났다. 서하는 소수 민족 강족(羌族)의 일파인 당항족(党项族) 이원호(李元昊)가 1038년에 세운 나라로 1227년 몽고족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90년 동안 현 중국의 서북지역을 통치했다. 송(宋) 나라가 거란족 요(辽) 나라에게 비단과 곡물을 바치게 되는 굴욕적인 ‘전연지맹(澶渊之盟)’ 이후 발생한 힘의 불균형을 이용해 나라를 건국하고 삼국 정립(鼎立)을 구현했다.
칭기스칸이 서하를 공략하다가 사망했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꾼 하(夏)나라는 자신만의 문자를 쓰고 불교를 숭상했던 나라로 세력을 키워 이원호는 드디어 제1대 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몽고족에 의해 멸망하기는 했으나 10대에 걸친 왕릉의 규모는 베이징 인근에 있는 명나라의 명십삼릉(明十三陵)에 비할 수 있다 하겠다.
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문물은 왕릉 내 ‘서하박물관(西夏博物馆)’에 전시돼 있다. 독특한 문자와 역대 황제들의 면면이나 독특한 자신들 민족만의 유물이 경이롭다. 호왕릉(昊王陵)과 쌍릉(双陵)을 비롯해 9개의 황제 능원과 북문 등 궁궐의 흔적만 남았지만 그 옛날 중국 서북지방을 호령하던 나라답게 그 문물과 유적이 상당하다.
서북방면의 한 지방정권이고 한족 문화의 범주에 포함해놓고 있지만 동북방면에서 고구려를 역시 지방정권이라 칭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하왕릉에서 북쪽으로 다시 20여분 가면 허란산(贺兰山) 중턱에 쌍탑(双塔)이 있다.
인촨(银川) 시에서 서북쪽 50킬로미터 부근이다. 그 건축시기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쌍탑(双塔)이지만 서탑 12층 동편에 하나라 문자가 쓰여있는 것과 석가모니 불상을 신봉한 하나라 불조원(佛祖院)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해 하나라 시대에 건축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두 탑 사이의 거리는 80여 미터이고 대칭적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동탑은 39미터 13층이고 서탑은 36미터 14층이다. 천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그 자태와 풍모를 그대로 간직한 쌍탑. 하나라의 든든한 뒷산 허란산에서 평야를 바라보며 세월을 반추하고 있는 모습이다. 썰렁한 입구, 관광객이라고는 거의 찾지 않는 외로운 쌍탑이지만 비바람에도 버텨온 두 탑의 조화와 균형은 참으로 아름답다.
쌍탑에서 북쪽으로 10여분 가면 허란산 계곡에 보물처럼 숨어 있는 암화(岩画)를 만날 수 있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암석마다 갖가지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이런 암화(岩画)들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북방의 유목민들이 만든 것이 많다고 한다. 그 이후 각 시대마다 이런 서민적인 암화를 새겼다고 전해진다.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으나 원숭이(猴), 소(牛), 말(马), 당나귀(驴), 사슴(鹿), 새(鸟), 이리(狼) 등 동물 그림이 많다.
북방민족이란 흉노(匈奴), 선비(鲜卑), 돌궐(突厥), 회흘(回纥, 위구르), 토번(吐蕃), 당항(党项) 등 소수민족들을 말할 것이다. 서민들이 자신의 정서와 삶을 단순하지만 해학적으로, 진솔하게 새겨 넣은 암화들이 계곡을 따라 오르는 암석마다 보일 듯 말 듯 드러난다.
게다가 허란산 암화가 산재해 있는 계곡은 푸른 하늘과 쭉 뻗은 나무, 그리고 하얀 구름이 어울리는 한 폭의 동양화라 할 정도로 화사하다. 보일 듯 말 듯한 암화를 잘 볼 수 있도록 표시한 빨간 색 마크를 따라 열심히 관람했다. 이 독창적이고 희귀한 허란산 암화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된 상태인데, 허란산 일대를 비롯해 몽골공화국에도 꽤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하왕릉과 쌍탑, 그리고 허란산 암화를 보고 중국 영화의 산실이라 일컫는 영화 촬영세트장으로 향했다. 인촨 서북부 황야 쩐베이빠오(镇北堡) 고성(古城)에 구축한 중국 영화와 드라마 촬영 장소인데 공식 명칭은 화샤씨뿌잉스청(华夏西部影视城)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중국영화는 이곳에서 세계로 향한다(中国电影从这里走向世界)’라는 문구가 버티고 섰다. 쩐베이빠오 영화 세트장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중국 시대, 명나라,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각각 조성돼 있다.
중국 현대사회의 대부분은 신중국 이후, 특히 문화대혁명 시대를 상징하는 마오쩌둥과 관련된 세트가 많고, 중국 농촌이나 도시의 가정을 많이 꾸몄다. 80년대에 주스마오(朱时茂)가 주연한 영화 <목마인(牧马人)>이 중국영화제의 상징인 백화장(百花奖)을 수상한 이래 많은 영화를 촬영한 장소이다. 장이머우(张艺谋)는 이곳을 ‘신비한 보물의 땅(神秘的宝地)’이라 극찬한 곳이기도 하다.
명나라 세트장 밍청(明城) 입구는 성곽으로 꾸몄다.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에서 촬영된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들이 있고 인상적인 촬영세트가 곳곳에 보존돼 있다. 대부분 영화적인 감동을 줄만큼 멋진 곳이 많지만 그 중에도 인상적인 곳은 영화 <신용문객잔(新龙门客栈> 촬영 장소.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와 객잔의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 물론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긴 해도 분위기가 남다르다.
역시 시대극은 전쟁 장면이 많아서 그런지 여러 전쟁무기와 장면들이 많다. 말과 낙타도 있고 당시 풍속도 시연하고 있습니다. 양모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저씨가 촬영을 위해 열심히 시연해주고 있다.
이곳에는 두 곳의 보루(堡)가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라오빠오(老堡)는 1500년 명나라 홍치13년 때, 씬빠오(新堡)는 1740년 청나라 건륭 5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모두 지금은 중국 영화와 드라마 곳곳에 등장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곳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북쪽 민족들의 침입을 막던 방패막이였던 셈이다.
1988년 제작된 장이머우의 영화 <홍까오량(红高粱)>은 자신은 물론 꽁리(巩俐)를 세계적인 배우로 탄생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붉은 수수밭>으로 잘 알려진 영화 중에 등장하는 위에량먼(月亮门)도 그대로 보존돼 있고 꽁리가 살던 집과 이불, 시집 갈 때 탔던 마차, 술 제조하는 항아리와 창고도 잘 보존돼 훌륭한 관광지가 됐다. 게다가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직접 술도가를 만들어 술을 빚었다 하니 역시 좋은 영화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닌가 보다.
6월 말이라 땡볕이다. 이미 2시간 가까이 수많은 영화와 만나고 살펴보고 찍고 하니 정신이 몽롱하다. 담배 한대 피면서 그늘에서 쉬었다.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사람처럼 다시 기운을 낼 일이다. 다시 따가운 햇살을 건너야 한다. 이미 아편쟁이처럼 중국 영화 속에 푹 빠졌으니 어쩔 수 없다.
밍청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칭청(清城)은 바로 청나라 시대 촬영 세트장.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입구에 중화민국 국기가 보인다. 청나라 세트장 거리가 풍물 전시장 같다.
만두와 닭고기를 비롯 다양한 먹거리가 있고 염직 시연과 같은 풍물도 있으며 구두수선공 등 서민적인 거리의 모습이다. 청나라 말기 총독부 건물도 있는데 공작 한 쌍이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기도 하다.
최근 중국 드라마 중 인기를 많이 끌었던 <챠오쟈따위엔(乔家大院)> 세트장이 있어서 아주 반가웠다. 장친친(将勤勤)이 주연한 드라마로 싼씨(山西) 성 핑야오(平遥)를 배경으로 청나라 말기 상인이었던 집안을 그린 드라마.
이곳은 중국의 유명 소설가이면서 사업가이기도 한 짱씨엔량(张贤亮)이 조성했다. 그는 일찍이 영화세트장을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황량한 땅에 중국 대중문화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그의 선견지명으로 중국의 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좋은 영화’의 꿈을 이어갔다.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들은 중국 영화의 미래를 품고 있기도 하다. 마치 ‘중국영화는 이곳에서 세계로 향한다’는 메시지처럼.
청나라 세트장 입구에 찻집이 있다. 엄청 큰 차 주전자 옆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처럼 볼거리가 많은 세트장을 찾아오려면 참 멀기도 하구나 생각했다. 베이징에서 오려면 기차를 타도 15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니 말이다. 이렇듯 문화유산 자체를 통째로 영화 세트장으로 꾸밀 수 있다는 것도 참 부럽기도 하다는 생각도 했다.
3시간 동안 중국 영화 역사 속에 푹 빠졌다 나온 듯하다. 밖에서 기다리던 운전사가 투덜댄다. 1시간 반이면 다 볼 거라고 하더니만 결국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뜻이겠다. 즉, 추가 요금을 은근히 요구한 것이다. 못 들은 척해야 마음이 편하다.
기차 역에서 요금을 지불하고 다시 짐이 있는 신청으로 갔다. 기차 시간까지는 아직 4시간이나 남았다. 신청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한국상품 가게를 발견했다. 과자를 몇 개 사고 ‘혹시 한국 음식점 있냐?’고 물으니 예상을 뒤엎고 있다고 한다.
원화똥지에(文化东街) 159번지. 걸어서 ‘전통 한국요리 경복궁(景副宫)’을 찾았다. 한복을 차려 입은 한족 복무원 4명이 참 인상도 좋다. 마침 나이가 지긋하신 사장님이 바로 앞자리에서 인사를 건넨다. 알고 보니 한국사람이다. 너무 놀라서, ‘아니 인촨에서 한국음식점이 있을 줄 몰랐다’고 하니 이곳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인촨이 너무 좋아 눌러 앉았다 하신다. 기차 표를 예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사장님이랑 밤새 술을 마셨을 지도 모른다.
사장님 말처럼 정말 인촨은 기대한 것보다 많은 문화유산과 볼거리가 있는 도시이다. 게다가 중국 전 성(省)을 다 갈 계획이었으니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바로 란저우(兰州)로 갔더라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밤 기차에 오르자마자 쏟아지는 졸음이야말로 기쁨 그 자체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blog.daum.net/youyue에 게재 예정
2008.01.15 08:47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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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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