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팩션 35] 린하이 해변의 눈물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 2008.03.22 19:19수정 2008.03.2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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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유원   이 소설의 인물 김태수와 백주원이 함께 본 유원의 연꽃

유원 이 소설의 인물 김태수와 백주원이 함께 본 유원의 연꽃 ⓒ 김갑수


중국의 정세가 반전하고 있었다. 1914년 여름에 발발한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각축 양상에 변화를 초래했다. 유럽 전선에 국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중국을 소홀히 하고 있는 틈을 타 일본은 중국에서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수십 년 전 삼국 간섭에 의해 포기했던 산동반도에서의 이권을 모조리 차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은, 독일이 영국의 적국이 된 상황을 이용하여 영일동맹을 구실삼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물론 산동성에서 독일이 누리고 있는 이권을 빼앗고 싶어서였다. 영국은 혹시 일본이 중국에 있는 독일 함대를 공격해 주리라 기대하고 일본의 참전을 용인했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에서 이권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결국 영국도 일본을 견제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미 조선과 대만을 일본에 줬다고 생각하는 구미 열강은 더 이상 일본의 세력 확장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이 유럽 전선에서 급박하다는 것을 아는 일본은 산동성 전역으로 군사 행동 반경을 확대하면서 청도를 점령해 버렸다. 원세개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그들은 원세개 정부에 21개조의 요구 사항을 제시한다. 그것은 산동성의 독일 권익 양도와 철도 부설권을 비롯한 중국 내 모든 이권을 싹쓸이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조선 침략의 방법으로 삼았던 고문정치와 경찰 공동 관리 등의 요구를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저의를 공개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것은 일본인들의 기회주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영락없이 친구의 집에 불 난 틈을 타고 들어가 물건을 도둑질하는 꼴이었다.

한편 원세개는 1년 반 후에 병으로 죽게 될 자신의 운명을 감지할 리가 없었다. 그는 요구를 들어주면 황제를 만들어 주겠다는 일본의 회유에 실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21개 요구가 신문에 보도되자 중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한층 고조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스스로 황제 자리에 등극한다. 그러자 구미 열강은 원세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국민당계의 급진 세력은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원세개의 고위 관리들이 잇따라 사퇴하면서 원세개는 사면초가의 고립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는 병으로 죽는다. 그러자 어느 세력도 전국에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가운데 군웅할거의 형태로 열강 하나씩을 붙들고 의지하며 서로 대립하는 극심한 분열상이 중국 전역에 전개된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명분에서 앞서는 세력은 단연 손중산의 광동정부였다. 그는 국민당을 혁신하여 다시 지도자의 위엄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이미 중국 대륙의 7개 성 영역에 지배권을 회복해 놓고 있었다. 손중산이 원세개에게 밀려 미국과 일본을 전전하다가 다시 상해 조계로 몸을 숨겼을 때, 그는 먼저 사람을 보내 신규식에게 안부를 물을 정도로 각별한 우정을 보였었다. 신규식도 틈나는 대로 민필호나 이범석을 보내 그의 건강과 생활을 염려해 주었었다.


신규식은 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국가 사절단의 위용을 갖춰 손중산의 광동정부를 예방하고 정부 승인을 얻는 것을 구국의 1차 목표로 정립하였다.

김태수는 고려상사에 나가면서 민제호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백주원도 민제호를 아주 비범한 인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 김태수는 그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민제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그는 평소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면서도 어느 때에는 보통 이상으로 시니컬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여간해서 애국이나 애족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남달랐다. 그리고 분개하거나 슬퍼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는 일본을 특정하여 한국의 적으로 간주한다기보다 제국주의의 일부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피력했다. 그는 자신이 나라를 사랑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나라든 민족이든 어느 경우에나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김태수는 독립운동을 위해 처자를 두고 중국에까지 온 사람의 말로 들리지 않아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그러면 왜 독립운동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사람이 할 일로는 이것밖에 없으니까 하는 겁니다.”

민제호의 말은 우국지사들의 말보다 오히려 단호한 데가 있었다. 그의 말을 해석하면, 독립운동을 안 하는 한국인은 사람도 아니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제호는 언제나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신은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자기의 노력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별 소용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은 인간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안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제국주의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만약 자기가 제국주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그러면 그 삶이 얼마나 더 힘들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김태수로서는 처음 대하는 논리였지만 민제호만큼 그를 공감시킨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그런 이유라면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자기의 취향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 들었다.

게다가 민제호는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가지는 가치를 가장 높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허무한 가운데 그나마 목숨 걸고 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내 속화되거나 변질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절대적인 사랑을 만나 그것을 이룬 후 죽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쓸쓸히 말했다. 게다가 자신은 건강이 매우 안 좋다고 했다. 그리고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민제호는 백주원은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했다.
“그녀가 김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든 진짜 행복한 것은 김 선생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민제호는 무언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의 자질이고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결국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자기는 신규식 선생 같은 분을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자기에게는 그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할 사람도 없고 대상도 없다고 말하며 그는 쓸쓸히 웃었다.

“김 선생, 영파에 연락 갈 일이 있는데 백 동지와 함께 다녀오시지요.”
영파(닝보우)는 항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닷가의 도시였다.

김태수와 백주원은 영파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영파에서 조선인 포목상을 만나 상해에서 보내 온 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갔다. 한 시간쯤 후에 그들은 임해(린하이)에 도착했다. 주소를 물어 한 어촌에 있는 중국인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꽤 늦은 시간이었다. 중국인은 두 사람을 예의를 갖춰 맞이했다. 그는 30대 중반쯤 되는 이였는데 중국 국민당의 핵심 인사라는 것을 두 사람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백주원이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손중산 총통께서 다음 달 초 영파에 가신 답니다. 그때 뵙자는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신규식 선생을 거쳐 온 연락입니다."
“오! 예관 선생, 그 분은 내 은인이십니다. 예관 선생도 이렇게 경치 좋은 데서 며칠 쉬시면 좋으련만.”

그는 중국 국민당의 당계요였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국에 와 북로군 총사령과 운남성 성장을 지낸 거물이었다. 또한 그는 원세개에 맞서 호법군을 조직한 혁명가였다. 그는 지금 광동성 비상국회 원수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다만 기관지에 병이 있는데다가 일본 관헌이 체포 제1순위로 지목하고 있는 인물이어서 요양 겸 피신을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다. 일본 관헌들은 변복과 변발로 위장하고 아무 데나 침투하기 때문에 체포 1순위로 지목되면 누구라도 당분간 몸을 숨기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사실 신규식도 위험한 상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 때문에 몸을 숨길 수 없을 뿐이었다. 다행히 신규식에게는 충심으로 따르는 중국인 청년이 몇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조신이라는 청년은 신규식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경호했다.
“예관 선생께서 안부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백주원은 하녀를 불러 금일봉을 전했다. 그러고는 당계요에게 김태수를 소개했다.
“조선 거부의 상속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당계요 #린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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