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팩션 36] 백주원의 두 남자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 2008.03.25 17:16수정 2008.03.2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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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십니다. 거부라서 대단한 게 아니고 그런 분이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 중국에도 이런 청년이 필요합니다.”

얼마 후 하녀는 생선회 안주와 배갈을 상에 차려왔다. 세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당계요는 손중산을 따르고 원세개에 맞선 사람이지만 두 사람에 대해 아주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김태수는 흥미를 가지고 경청했다. 백주원은 흥미 있게 듣는 김태수가 대견스러웠다.


“역사 발전 과정에서 손중산과 원세개는 똑같이 한계를 갖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손중산은 멸망해 가는 중국을 급진적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 결과 신해혁명을 성공시키는 듯했습니다. 새로운 중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맞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창조적 역량이 현저히 부족한 원세개와 제휴함으로써 혁명을 무산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의 미래는 다시 보수주의자들이 맡게 되었지요. 실력 있는 보수라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하는데 원세개에게는 그런 역량과 정신적 성숙이 결여되어 있었지요. 그는 황제가 되려 하는 등 개인적 영달을 추구하다가 자멸했습니다.”

“그럼 두 사람 모두가 중국 혁명의 완성자는 못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원세개는 이미 죽었고 우리 손중산도….”

그는 여기서 말을 끊고 배갈 잔을 입에 털었다.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손중산과 원세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김태수가 알기로 손중산은 급진이고 원세개는 수구였다. 그는 그 공통점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둘 다 인간입니다. 하나는 멋을 아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멋을 모르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혁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혁명은 괴물이 하는 겁니다. 아마도 미구에 이 대륙에 괴물이 나타나는 날, 우리 중국은 통일되고 안정될 것입니다. 물론 많은 피를 흘린 연후겠지만.”

두 사람은 파란을 겪은 혁명가의 발언에 조금 숙연해졌다. 그러자 당계요는 화제를 밝은 것으로 바꿨다. 그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사실 외진 벽촌에서 젊은이들의 방문을 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밝아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백주원과 김태수의 외모는 유달리 보기 좋았다. 말로만 듣던 예관의 여성 정보요원 백주원은 소문 이상으로 외모가 출중했다. 그는 예관 같은 친구를 둔 것이 스스로 흡족했다. 교양 있는 미녀와 거부의 아들을 부하로 거느리는 예관의 능력이 새삼 두드러져 보였다. 그리고 예관 역시 따뜻한 인간이므로 혁명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예감에 불쑥 사로잡혔다.

“나는 당신들 나라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당계요는 신라의 최치원을 잘 알고 있었다. 절강성의 양주, 항주와 저장성의 영파, 임해는 모두 중국 남방 교역의 요지였다. 그래서 중국 남방과의 교통로를 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중국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명나라 때는 멀리 아프리카와도 교역을 했다고 했다. 영파에는 큰 고려관이 있었다고 했다. 영파는 과거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요충지였다. 지금은 상해가 가장 큰 항구 도시지만 옛날에는 영파가 항주와 함께 고려인들과의 무역이 가장 성했던 도시라고 했다.


“나는 운남성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인이 쓴 <표해록, 漂海錄>이라는 책을 읽었다고 했다. 그는 마당 너머의 바다 쪽으로 눈길을 주며 말했다.

“<표해록>의 저자가 상륙한 곳이 바로 여기 임해입니다.”

당계요는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선인 최부는 학계에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가치가 더 높다고 하는 <표해록>이라는 기행서의 저자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의 고적했던 생활에 앙갚음이나 한다는 듯이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해변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는 하녀를 불러 두 사람의 침실을 안내하라고 일렀다. 하녀는 눈짓과 손가락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 

백주원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옆방 김태수의 방에서 난 문 소리 때문이었다.
‘이 새벽에 어딜 나가는 것일까?’

백주원은 김태수라는 남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씨와 표정과 눈빛 모두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김태수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고 예민한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헤어질 때 그에게 했던 말은 진실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열망과 진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싫지 않은 남자가 그런 눈빛을 보낼 때 그것을 황홀하게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녀는 그것을 김태수에게 알리지 않았어야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김태수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는 중국 도피를 서둘러야 했다. 다시 그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눈빛 얘기를 썼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것으로 인해 한 남자의 인생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김태수에게 해명하고 사과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해명이나 사과가 오히려 그를 절망케 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마 그런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요컨대 그녀는 김태수에게 아주 감상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연민 같은 것이었다.

백주원은 민제호를 생각해 보았다. 인간적 매력으로 볼 때 그만한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신규식 같은 유형보다는 민제호 같은 사람됨이 더 좋았다. 무엇보다도 민제호에게는 어설픈 점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비상한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단연 인간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신규식보다 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민제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 인간 아닌 것에 이성의 힘과 열정적 사랑을 쏟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 그것은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민제호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에서 그녀를 공감시키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성적 감정 같은 게 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감정은 김태수에게 느낄 때가 있었다. 그녀는 민제호와 김태수를 바꿔서 생각해 보았다. 만약 활터에서 만난 남자가 민제호였더라면 그에게 눈빛 얘기를 했었을까?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결국 김태수이기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김태수는 그녀에게 이질감을 줄 때가 간혹 있었다. 성적인 느낌으로는 좋아할 수 있는 남자 같은데 인간적 감정으로는 왠지 그가 멀리 있는 사람 같았다. 다시 말해 선호의 감정은 있어도 동화의 감정이 없는 것이었다.

백주원은 조용히 일어나 옷을 걸쳤다. 김태수는 바위에 앉아 새벽 어둠을 등에 묻힌 채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백주원은 먼발치서 그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는 미동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백주원은 발길을 돌리려 하다가 멈췄다. 그러고는 김태수가 있는 곳으로 소리 없이 걸어갔다. 미명이 먼 바다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처음 들어 보는 산새의 울음이었다.

그녀는 김태수의 등을 보며 걸어갔다. 가까이 갈 때까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멈추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김태수는 놀랐는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김태수가 아니라 백주원이었다. 김태수의 눈과 얼굴에 눈물이 그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김태수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김태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은 아직 식지 않았는지 미지근했다. 김태수는 고개를 바다로 돌렸다. 산새가 다시 울었다. 예전에는 전혀 못 들어 보았던 낯선 산새의 울음이었다.

덧붙이는 글 | 매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매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입니다.
#눈물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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