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진 명단 없애고 나서야 숨을 거두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39] 광주 - 조경환 의병장(1)

등록 2008.04.07 20:25수정 2008.04.1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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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강남 가다

a  아키츠키 향토관에 소장된 중세 일본 무사들의 갑옷

아키츠키 향토관에 소장된 중세 일본 무사들의 갑옷 ⓒ 박도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매체의 연재는 글쓴이에게 괴로움과 즐거움을 준다. 연재 기간 내내 그 부담에 시달리는 게 그 괴로움이요, 그런 괴로움 속에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게 그 즐거움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의 애초 계획은 2008년 3월 말까지 탈고인데, 이제 7부 능선에서 허덕이고 있다.

날마다 책상 앞에서 컴퓨터를 켜놓고 10부 능선인 정상에 오르고자 궁싯거리고 있는데 친구가 유혹을 하였다. 일본 규슈(九州) 지방 역사 문화 탐방에 동행치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5년 전에 그 친구와 같이 비슷한 탐방에 동행하면서 한일 역사와 문화 교류에 무지한 내가 공부를 많이 했던 터라 귀가 솔깃하였다.

손전화도 재충전이 필요하듯이, 나에게도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말이 떠올라, 늘 켜놓던 컴퓨터를 과감히 끄고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지난 3월 29일 일본 하카다행 배에 올랐다.

일본인의 잔인성

a  임진왜란 때 조선정벌에 선봉장이었던 기토 기요마사(구마모또성 소장).

임진왜란 때 조선정벌에 선봉장이었던 기토 기요마사(구마모또성 소장). ⓒ 박도

지난날 일본 규슈 지방은 우리나라와 가장 문화교류가 많은 지방이요, 원의 침입과 임진왜란의 출발지로 그동안 동양 삼국 간에 은원(恩怨, 은혜와 원수)의 고리가 얽힌 곳이었다.


그 소감을 이 글에 다 쏟을 수 없으나 아무튼 나에게는 일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기행이었다.

과거 우리나라가 '문(文)'을 숭상한 선비의 문화라면, 일본은 '무(武)'를 더 숭상하는 사무라이 문화였다. 일본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나라에 노략질을 숱하게 일삼았으며, 호시탐탐 노리다가 우리가 허약해 보일 때는 지체 없이 침략해 왔다. 1592년 임진년에 그랬고, 1910년 경술년에 재침하였다.


침략군에게 자비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들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상대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목을 베가거나 코나 귀를 베가기도 했고, 심지어는 왕후를 죽이고 시신을 불태우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날뿐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허점을 보일 때는 지체 없이 침략해 오리라는 느낌을 이번 기행에서도 지울 수 없었다. 여러 역사 유적과 문화재들을 보면서 그들의 야욕이 고양이 발톱처럼 숨겨 있는 것을 내 눈에는 보였다.

그리고 근세 청나라나 조선이 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나라 내부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함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위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히면서 재물을 착취하는 부도덕한 탐관오리 때문이라는 것도 다시 확인하였다. 구한말 부패한 수령들의 횡포에 참다못한 농민들이 갑오년에 민란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치 못한 조정이 외세를 끌어들인 결과 마침내 그것이 빌미가 되어 망국의 길로 치닫지 않았던가.

100년 전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 일본 주류들의 사고

a  키쿠치신사에 전시된 일본 사무라이들의 칼, 명성황후도 이런 칼날에 시해되었다.

키쿠치신사에 전시된 일본 사무라이들의 칼, 명성황후도 이런 칼날에 시해되었다. ⓒ 박도

3년 전, 한 방송국 본부장이 나에게 창사기념다큐제작 기획 아이디어를 부탁해 왔다.

마침 2005년 그해가 한일 우정의 해이기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의병장 후손과 왕산을 형장에 보낸 당시 조선주둔 헌병대장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 후손과의 화해하는 모임을 갖고자 이를 추진하였다.

즉, 가해자인 아카시 후손이 조상을 대신하여 한국을 방문하여 왕산 의병장이 순국한 서대문형무소나 왕산의병장 무덤이 있는 경북 구미로 와서, 지난날 사죄의 뜻을 담은 꽃다발을 왕산 영전에 바친 후 그 자리에서 왕산의 후손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먼저 담당 PD가 도쿄에 사는 아카시 손자 아카시 모토츠구을 찾아가 그 성사 여부를 타진했다. 그런데 아직도 당신 할아버지가 왕산을 심문할 때 주고받은 대화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을 알고는 애초의 기획과는 달리 전혀 다른 왕산 가족들의 수난사(EBS '왕산가 사람들')로 만든 적이 있었다.

a  왕산 허위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13도 창의군 군사장 ⓒ 박도

그때 담당 PD가 나에게 전한 바, 아카시 손자 아카시 모토츠구는 할아버지 덕분에 일본 사회에서 주류(귀족)로 산다고 했다. 1908년 5월, 왕산 의병장이 아카시 일본 헌병대장과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왕산: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한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당랑(螳螂 버마재비)이 수레를 막듯이,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아카시: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병자의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비록 한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다."

지도층의 부패로 내홍을 겪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나는 이번 일본기행 내내 우리 정부 지도층의 도덕성을 생각하면서 매우 우울했다. 나라의 안보도, 경제도, 지도층의 도덕성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죽는 순간에도 부하를 생각하다

이번 나의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를 도와주는 분이 많다. 조경환 의병장 손자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도 한 분이다. 의병 후손의 연락처를 찾아 알려주고, 또 후손들에게 취재 협조를 당부하여 주기에 나에게는 백만 원군과 같은 분이다. 조세현씨는 의병선양회 부회장직도 맡고 있기에, 나는 의병선양회 주관 의병 답사에 두 차례 동행하여 많은 대화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들은 할아버지 조경환 의병장 일화의 감동은 매우 컸다.

1909년 음력 섣달, 대천 조경환 의병장은 광주 어등산 사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교전 중, 적탄 두 발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그런 가운데도 조 의병장은 품안에 간직한 의병진 명단을 일제 헌병대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조 의병장은 의병진 명단을 찢다가 생각하니 그 조각을 모으면 왜적들이 이를 알 것 같아서 입으로 씹어 삼키려다가 분량이 많아 부싯돌로 태우려 하였다. 하지만 안간힘을 다해도 불이 붙질 않아서 양화(성냥불)를 구해 명단을 불사른 뒤에야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 의병장 순국 후 부하들과 동지들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는 후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전의 할머님 말씀을 전한 바, 당신은 남편이 몰래 찾아올 때를 거의 정확하게 육감으로 알았다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미리 토지문서와 옷 한 벌을 머리맡에 장만해 뒀다고 한다. 그런 날 한밤중에 할아버지가 몰래 담을 넘어 안방으로 와서 잠시 머물며 한바탕 방사를 치른 뒤 옷을 갈아입고 토지 문서를 들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하였다고 했다. 그런 탓인지 당신은 의병으로서는 꽤 많은 4남매(3남1녀)의 자녀를 두셨나 보다.

끝까지 동지와 부하를 지키는 그 의리가 100년을 지난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의병활동 가운데도 집에 두고 온 아내를 찾아온 당신의 뜨거운 정열이 가상하기도, 눈물겹기도 하였다.

a  대천 조경환 의병장

대천 조경환 의병장 ⓒ 조세현

a  조경환 의병장 부인 이동임씨

조경환 의병장 부인 이동임씨 ⓒ 조세현


내가 먼저 희생한다

이런 이야기를 좀 더 듣고자 오래 전부터 조세현씨에게 대담을 청했으나, 정작 당신 할아버지 취재에는 여러 차례 부탁해도 응해주지 않기에 마침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지난 4월 2일 이른 아침, 여의도 광복회관으로 찾아갔다. 조세현씨는 오는 2008년 5월 23일 오후 2시에 프레스센터에서 열릴 2008년도 의병정신선양 학술토론회를 앞두고 그 준비로 몹시 바쁘다고 하였다.

"해방 후 우리 국군이 군사정권을 겪으면서 주체성이랄까, 정통성을 잃고 있어요. 그래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과 가족 모두를 희생해 가면서 처절하게 왜적과 투쟁한 의병들의 높은 희생의 가치를 재조명함으로써, 후세 교육 자료와 함께 우리 국군의 정통성도 확립해 주고 싶습니다."

a  광복회 조세현 특별위원

광복회 조세현 특별위원 ⓒ 박도

그러면서 우리 국군의 뿌리는 '동학군→ 의병→ 독립군→ 광복군→ 국군'으로 명맥을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옳을 '의(義)' 자는 희생의 제물을 상징하는 양 '양(羊)' 자에, 나 '아(我)'자를 합성하여 만든 글자로, 곧 '내가 먼저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탓인지 곁에서 지켜 본 조세현씨는,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 것을 먼저 챙기거나 자기 조상을 앞세우기 마련인데 견주어,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당신 조상보다 남의 조상을 먼저 챙기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의병 후손으로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세요.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구한말 의병 수는 약 30만 명 내외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분은 고작 18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참한 현실이지요. 저희 집도 하루 세 끼 끼니 잇기가 어려웠고, 쉰밥 먹기가 일쑤였지요. 그 얘기는 이 정도로 끝냅시다. 저만 겪은 고난이 아니잖습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국역 허위전집>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국역 허위전집>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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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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