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49] 2·8독립선언과 무오독립선언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 2008.04.20 15:17수정 2008.04.2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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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1918년 12월 15일 영자지 <저팬 에드버타이저>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이라는 제하로, 한국인들이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신문은 3일 후,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연례총회에서 약소민족들이 파리회의 발언권을 요구했다는 후속 기사를 내보내면서 한국 대표도 여기에 포함되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일본 유학생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상해에서 파견된 조소앙은 많은 유학생들을 만나고 있었으며, 이 사실은 신규식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간다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그들은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한 후 200여 명의 회원들에게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이를 일본의 국회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새로이 결성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이를 국내에 반입시켰다.

<2·8독립선언>의 주도 인물은 최팔용이었다. 오성학교를 마친 후 일본에 온 그는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학지광’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우리 사회의 난파’ 등을 비롯한 글을 여러 편 발표했고 토론회에 참석하여 ‘민족불멸론’을 설파하기도 했다.

그는 거사 전 날인 2월 7일 일문으로 <민족대표소집청원서>를 시바구 이토인쇄소에서 제작하고 독립선언서에 부치는 결의문을 국문, 일문, 영문으로 만들었다. 그는 거사 당일인 2월 7일 오전 10시, 청원서와 선언서를 먼저 우편으로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 일본 정부의 대신들,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냈다.

최팔용은 오후 2시 기독교청년회관으로 가 600명의 학생을 지휘하여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날 선언회장은 환호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실행위원 10명과 함께 관할 니시간다 경찰서장에게 체포되었다. 거사 후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벌이다가 359명이 조국으로 돌아가 3·1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한국은 4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주 독립국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독립해야 할 근거는 명백하고 정당하다. 일제 침략과 국권 찬탈은 사기와 폭력에 의한 수치스러운 역사였다. 왜 한민족이 수십만의 희생자를 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지 일본은 알고 있다.


식민 정책은 한민족의 생존권 박탈, 자유 억압, 민족 차별을 자행한 고대적 노예정책이다. 자유를 위한 조선 민족의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은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의 전제 조건이 된다. 앞으로 한민족이 건립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이다. 이 국가는 세계 평화와 인류 문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2·8독립선언문에는 4개 항의 결의문이 선명히 제시되어 있었다.


1. 우리는 한일병합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
2. 조선 독립을 위한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한다.
3. 세계평화회의에 민족 대표 파견을 관철한다.
4. 위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최팔용은 일본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서 피를 흘리며 맨주먹으로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고국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32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편 다른 실행위원인 송계백은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선언서를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에게 전달하여 기미독립선언에 참고토록 한다. 그는 현장에서 맹렬한 만세 운동을 벌인 다음 중국으로 가 독립군에 가담하게 된다.

아주 먼 훗날,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나서 대한민국 정부는 한 일본인에게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이 이례적인 일본인은 최팔용을 비롯한 당시 동경 유학생들의 변론을 맡았던 후세 다쓰지이다. 후세 변호사는 2·8 유학생 말고도 1924년 동경 제국주의 지도자 회의장에 폭탄을 던진 이중교를 변호했고, 1926년 일제의 왕과 왕족을 폭살하려는 거사를 감행하려다 체포된 박열의 변론을 자처하는 등 제국에 맞서 싸운 작은 영혼들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패자, 약자, 떠돌이, 고향을 잃어버린 자, 조국에서 쫓겨난 자, 국경 없는 유랑꾼이 우리의 별명이요, 오대양 육대주 사람 사는 거리거리 가는 곳마다 발 구르는 소리요 피눈물이었다.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가 나라 없는 죄요, 뼈저린 설움이 나라 잃은 설움이어라. 벽옥 같은 조국의 하늘, 기름진 이 강산을 두고 갈 곳이 어디인가? 제 어깨로 제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할지니 형제여, 짐승으로 살려 하는가? 나라 없는 개가 되랴?

이 피 맺힌 목청으로 조국의 서울에서 함성이 솟았다. 삼천리에는 온 민족의 함성과 핏물이 흐르는 세기의 행진곡이 시작되었다. 동포여, 도시의 거리로 나아오라! 봉사여, 귀먹이여, 입 있는 벙어리여, 굶주린 내 동지여! 삼천리 내 땅 내 거리 내 누이 원통하게 죽은 혼들이여, 모두 나오너라! <충무독립선언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기미독립선언에 호응하는 선언서들이 발표되었다. 기미독립선언은 전국적인 파급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것은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독립선언의 배경에 일찍부터 중국과 노령으로 건너가 개인의 영달을 포기한 채 목숨 내놓고 활약했던 선각 독립운동가들의 결정적인 공헌이 있다는 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1918년 무오년 11월, 국외 지도자급 독립운동가 39명이 망라된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문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문이었고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문이었다. 2·8독립선언문은 이 선언문을 전범으로 삼은 것이었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게 하라’고 요구한 이 선언문은 2천만 동포에게는 육탄 혈전을 주문했고 일제에 대하여는 무력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일면 선전포고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선언문은 가나다순으로 발의자의 명단을 밝히고 있는데, 신규식과 박은식, 박찬익, 조용은, 신채호, 이동녕, 이시영, 김규식, 박용만, 안창호, 여준, 이승만 등 이외에도 놀랍게 김좌진 등의 무장 독립운동가가 합세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민족 대표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손병희와 최남선의 의도로 온건하게 바뀌면서 내세운 명분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말대로 과연 조선의 민중은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 비폭력이고 무엇을 위한 질서 존중이었는지 회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여기는 사람도 최소한 그 시대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나약성과 타협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구국 행위였다. 그들의 용감한 활동이 전국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그들의 말로는 폭동의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후 공판의 변론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오후 3시, 명월관이 이름을 바꾼 요릿집 태화관에서 모였다. 그들은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다.

그들 중의 다수는 국제 정세를 읽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적국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쳤고, 미국의 도움을 과신하는 타협적이고 의존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33인의 대표 격으로,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손병희는 이미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한다’고 생각하여 일본에 군비 일만 원을 헌납한 일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민중은 자기들처럼 무슨 일을 흉내나 내고 그만 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승에 줄줄이 달려가는 모습을 민중이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감격할 것인지를 헤아리는 두뇌도 없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차며 비웃었다고 했다.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그들은 말했다.(계속)
#2`8독립선언 #최팔용 #무오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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