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명의 학생들 앞에서 난데없이 춤을 추다!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기 7] 도보여행 6일(우르겐치 -> 베루니)

등록 2008.11.12 09:19수정 2008.11.1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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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르겐치 시내의 동상

우르겐치 시내의 동상 ⓒ 김준희


길가의 크고 깨끗한 건물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건물은 꼭 관청이나 학교처럼 보인다. 무슨 일로 사람들이 모였을까. 오늘은 9월 2일, 우즈베키스탄의 독립기념일 다음날이다. 나는 우르겐치에서 하루를 푹 쉬고 깨끗해진 몸과 가벼운 마음으로 베루니를 향해서 걷고 있다.

그런데 저 건물 앞에 모인 사람들이 자꾸 신경 쓰인다. 밖에서 기웃거리던 나는 한걸음 한걸음 건물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 나를 쳐다본다. 젊은 사람 한 명이 다가오더니 영어로 말을 붙인다.


"여행객이에요?"
"예, 한국에서 왔어요. 여기는 학교예요?"
"아뇨, 칼리지예요"

건물 앞에는 '칼리지(KOLLEJI)'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나한테 말을 건 친구는 이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는 후산이다. 후산이 나를 잡아끈다.

"이 앞쪽 자리로 와요."
"아뇨. 그냥 이 뒤에서 볼게요."

그러자 후산과 또 다른 학교직원이 내 팔을 잡고 앞으로 이끈다. 무슨 행사를 하는 건지 학생들이 건물 앞에 모여있고, 건물 계단 위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성이 반갑다면서 내 손을 잡고 악수한다. 후산이 말한다.

"이 칼리지 교장선생님이에요."


갑자기 난감해졌다. 그냥 뒤에서 좀 구경하다가 가려고 했는데, 왜 날 이 앞으로 오게 했을까. 교장이 나를 자신의 옆 의자에 앉게 했다. 후산도 통역을 위해서 내 옆에 앉았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날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방학이 끝나고 칼리지가 다시 시작하는 날이란다. 그러니까 개학식을 하는 중이다.

칼리지 개학식에 초대받다


a 베루니 가는 길 칼리지 개학식에 초대받다

베루니 가는 길 칼리지 개학식에 초대받다 ⓒ 김준희


교장이 마이크를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한참동안 학생들에게 연설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몸이 화끈 달아오른다. 옆에서 후산이 말한다.

"일어서서 한마디 하세요. 제가 통역할게요."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지나가는 여행자를 불러서 개학식에서 한마디 하라니. 난감했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면 한국 남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는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나를 향해있는 수백개의 눈동자.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입니다. 누쿠스에서 타슈켄트까지 걸어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베루니에 가는 길인데 우연히 이 칼리지에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개학식에 초대해줘서 고맙고, 어제가 우즈베키스탄의 독립기념일이었던 것을 축하합니다."

후산이 이 말을 우즈벡어로 통역해서 다시 말했고, 학생들은 박수를 친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 반주에 맞춰서 어떤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 개학식 축가인 것 같다. 몇 곡을 부르고 나더니 교장이 나한테 무슨 말인가를 한다. 후산이 통역한다.

"앞에 나가서 자기랑 같이 춤추자고 하는데요."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움찔했다. 춤? 내가 춤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나보고 춤을 추라고?

"춤요?"
"예. 같이 춤추면 자기가 정말 행복할 것 같답니다."

어느새 교장은 일어서서 내 팔을 잡고 앞으로 이끈다. 아까 그냥 지나쳐 가는 건데 왜 내가 이런 난감한 상황을 자초했을까. 후회해도 소용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보는 수밖에. 커다란 음악 속에서 교장은 날 데리고 학생들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중년의 한 여성도 합세했다. 참 특이한 개학식이군. 교장이 학생들 앞에서 춤을 추는 개학식이라니. 한국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학생들 앞에서 교장과 춤을

a 개학식 후의 식사 가운데가 교장, 내 옆이 후산

개학식 후의 식사 가운데가 교장, 내 옆이 후산 ⓒ 김준희


나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기와서 춤을 추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럴줄 알았다면 '텔미 춤'이라도 배워오는 건데 그랬다. 춤이 뭐 별건가. 리듬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면 그게 춤이지. 나는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춤인 '개다리춤'을 열심히 추었다.

덩실덩실. 덩실덩실. 둥그렇게 모여서서 우리를 쳐다보는 수백명의 남녀학생들. 이들의 대부분은 아마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어디서 굴러먹던 외국인인데 여기와서 춤을 추고 있나?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도 있을지 모른다. 흥겨운 음악이 계속 이어지고 어느새 나도 점점 즐거워진다.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직원은 계속 우리 주위를 돌면서 춤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내가 춤추는 모습이 앞으로도 이곳에 남아서 학생들 입에 오르내리겠군. 이걸 좋아해야할지 싫어해야할지 모르겠다.

몇 곡의 음악이 흐르고 나서 기나긴 춤 시간이 끝났다. 개학식도 끝났다. 교장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방의 긴 탁자에는 어느새 볶음밥과 과일, 빵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교장과 후산, 몇몇 중년 남녀들이 그 탁자에 둘러 앉았다. 후산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도 학교 교사예요?"
"아뇨. 이 지역의 주요인사들이에요."

아까 나랑 같이 춤을 추었던 중년 여성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을부녀회장 정도 되는 인물이다. 후산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늘부터 이 칼리지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단다. 교장은 사진집을 꺼내더니 나에게 보여준다. 거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도 있다. 한참 먹다보니까 교장은 아까부터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

"교장은 왜 안 먹어요?"
"지금 라마단 금식 기간이라서요. 한달 동안 낮시간에는 먹으면 안 돼요. 이슬람 전통이에요."
"그럼 후산은 왜 먹어요?"
"금식이 의무인 건 아니거든요. 원하는 사람만 금식하면 돼요."

식사시간도 끝났다. 교장은 날 끌어안더니 방문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도 악수하면서 환영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걸어서 간다니까 교장은 생수, 빵, 과일을 봉지에 가득 담아서 주었다. 밖으로 나와서 단체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외국인한테 친절하거든요."

후산이 말한다. 외국인한테 친절한 건 좋은데, 너무 친절하니까 내가 난처해진다. 우리는 크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친절한 건지 아니면 정말 모든 외국인한테 친절한 건지 모르겠다.

이곳 현지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녀학생들 앞에서 축하인사를 하고 춤까지 추었으니 오늘은 정말 독특한 경험을 한 날이다. 저 학생들도 독특한 경험을 하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작은 도시 베루니에서 호텔을 찾다

a 베루니에서 나를 초대해준 친구 무자파르와 그의 어머니

베루니에서 나를 초대해준 친구 무자파르와 그의 어머니 ⓒ 김준희


나는 혼자서 웃으며 길을 걸었다. 작은 도시 베루니에 도착한 때는 오후 3시. 시장에서 환전을 하고 잠 잘만한 곳을 찾았다. 두리번 거리면서 길을 걷는데 승용차에 앉아있던 한 젊은이가 말을 붙인다.

"헬로우,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혹시 여기 호텔 있어?"
"베루니에는 호텔 없어. 잠잘 곳을 찾는 거면 우리집으로 가자."

이 친구는 30살의 무자파르, 한번 결혼했지만 얼마 후에 이혼해서 지금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단다. 집으로 들어가자 젊은 시절 꽤나 미인이었을 것 같은 무자파르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무자파르는 넓은 집의 곳곳을 나에게 안내해준다. 집은 무지 넓은데 역시 여기도 화장실은 바깥의 재래식이고 욕실은 없다. 이들은 평소에 어떻게 씻고 샤워할까. 정말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겠다.

"마이클 잭슨 알아? 내가 마이클 잭슨을 아주 좋아해."

무자파르는 한쪽 방에서 자신이 모은 마이클 잭슨의 커다란 사진 여러 장을 나에게 보여준다. 혹시 마이클 잭슨을 너무 좋아해서 이혼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것도 궁금했지만 역시 물어보지는 못했다.

"오늘 저녁에 동네에서 결혼파티가 있어. 이따가 같이 가자."

조용한 밤을 보내기는 다 틀렸다. 무자파르와 그의 어머니는 나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대접하면서 얘기한다. 무자파르는 사진첩을 가져와서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저녁파티시간.

결혼파티에서 다시 보드카에 취하다

a 베루니의 무자파르 마이클 잭슨을 아주 좋아한다.

베루니의 무자파르 마이클 잭슨을 아주 좋아한다. ⓒ 김준희


"혹시 파티에 입고 갈 만한 옷 있어?"

무자파르가 묻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이라고는 반바지와 카고바지, 반소매셔츠가 전부다. 파티에 입고 갈 만한 옷이라니?

"아니 없는데. 그냥 이렇게 반바지 입고 가면 안 돼?"

무자파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괜찮을 거라며 어서 가자고 한다. 골목길을 따라서 도착한 파티 장소. 커다란 음악이 쩌렁쩌렁 울리고 10여 개의 탁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다. 무자파르와 함께 탁자에 앉자 보드카와 맥주, 과일 등이 놓인다. 이 음식들은 모두 신랑신부 집에서 마련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리 앞쪽에는 새신부가 꽃단장을 하고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친구들도 함께 앉아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다. 외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하지만 낯선 현지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항상 쉽지가 않다.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어쩌면 화를 내는 현지인도 있을지 모른다. 오늘은 즐거운 결혼기념파티, 사람들은 서로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구하고 새신부는 나한테 다가와서 같이 춤을 추자고 한다.

낮에 그렇게 춤을 추고 또 춤이라니, 오늘은 춤으로 시작해서 춤으로 끝나는 날이군. 나는 새신부와 함께 마주 보고 서서 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건네주는 보드카도 연신 마셨다. 흥겨운 파티,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a 베루니의 결혼파티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새신부

베루니의 결혼파티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새신부 ⓒ 김준희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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