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쓴 겹말 손질 (47) 서울로 상경

[우리 말에 마음쓰기 489] '서울로 가는 길'과 '상경'

등록 2008.12.01 11:23수정 2008.12.0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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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로 상경

 

.. 확대기를 들고 서울로 상경해 온종일 집에서 인화를 했다 ..  《김영갑-섬에 홀로 필름에 미쳐》(하날오름,1996) 103쪽

 

‘온종일(-終日)’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지만, ‘온 하루’니 ‘하루 내내’쯤으로 손보면 어떨까 싶군요. ‘인화(印畵)’는 사진밭에서 쓰는 전문 낱말로 여길 수 있는 한편, “사진을 만들었다”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 상경(上京) :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옴

 │   - 가출 청소년들의 무작정 상경이 문제시 되고 있다 /

 │     내친김에 곧 상경 채비를 갖추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

 ├ 서울로 상경해

 │→ 서울로 와서

 │→ 서울로 가서

 │→ 서울로 찾아가

 └ …

 

국어사전에서 ‘상경’을 보다가 울컥하는 마음 누를 길 없습니다. “가출 청소년들의 무작정 상경이 문제시 되고 있다”라니요. 어디에서 이런 보기글을 뽑았는지, 아니면 국어학자들이 이런 보기글을 지었는지 궁금합니다. 국어사전을 엮으면서 사회문제를 다루겠다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만, 아이들을 얼마나 걱정하고 근심하기에 이런 보기글을 다 지었을는지요.

 

정보와 지식만 담는 국어사전이 아니라, 우리 삶을 소롯이 껴안으려는 국어사전으로 거듭나고자 이와 같은 보기글을 실었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소롯이 껴안으려는 국어사전이었다고 한다면, “가출 청소년들이 아무 생각 없이 상경만 하느라 나쁜 어른들이 꼬일 때 멋모르고 넘어가서 문제가 되고 있다”처럼 고쳐서 보기글을 다루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가출 청소년들의 무작정 상경이 문제시 되고 있다

 │

 │→ 집 나온 청소년들이 무턱대고 서울로 오느라 말썽이 되고 있다

 │→ 집을 뛰쳐나온 푸름이들이 그저 서울로 몰려드느라 말썽이 되고 있다

 └ …

 

짤막하게 실리는 국어사전 보기글 하나에도 우리들 삶이 담깁니다. 수많은 일간신문 사설에도 저마다 다 다르게 꾸리는 삶이 담기고, 학교에서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읊는 몇 마디 말에도 삶이 담깁니다. 국어학자들이 살아가는 대로, 또 국어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대로 국어사전이 달라집니다. 신문기자마다 살아가는 대로, 또 신문기자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대로 기사가 달라지고 사설이 달라집니다. 언제나 높은 자리에서 걱정없이 권력을 누리고 있는 분들이 쓰는 기사하고, 낮은 자리에서 어려운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쓰는 기사는 사뭇 다릅니다. 월급쟁이 교사와 아이들 삶에 깊이 마음쓰는 교사가 하는 아침모임이나 저녁모임은 크게 다릅니다.

 

 ┌ 곧 상경 채비를 갖추고

 │

 │→ 곧 서울 갈 채비를 갖추고

 │→ 곧 서울로 갈 짐을 꾸리고

 └ …

 

말이란 우리 삶입니다. 말에는 우리 생각과 마음이 담깁니다. 말에는 우리 삶터 모습과 우리들 발자취와 우리들 일과 놀이가 알알이 배입니다.

 

국어사전은 말 한 가지로 이야기를 건네는 책입니다. 말 한 가지를 살피며 한 나라 사회와 문화와 역사와 교육과 예술 모두를 오롯이 깨달아 가도록 이끌어 주는 길동무입니다. 말은 말대로 살포시 담으면서, 말에 담긴 뜻과 느낌을 좀더 지긋이 담아내는 이슬떨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보와 지식만으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기에, 아니 정보와 지식은 사람 삶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 삶은 눈물 웃음 콧물 피 땀방울입니다. 우리 삶터와 멀거니 떨어진 채 정보와 지식만 건네려는 국어사전이라면 사람들 책상맡이나 잠자리맡에 놓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 손길을 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험생들 가방에는 들어갈 수 있겠지요.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면 바로 버려지는 수많은 문제모음과 참고서처럼, 잠깐 쓰이고 버려지는 1회용품이 될 수 있겠지요.

 

국어학자들이 국어사전을 1회용품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또한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대학입시와 논술을 생각하면서 한동안 들춰보는 참고서쯤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합니다. 올림말과 말풀이도 달라져야 하지만, 국어사전에 담는 보기글도 함께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꾸려나가는 삶을 헤아리는 마음이 담기는 보기글이어야 하고, 우리 스스로 말과 글을 알차게 가꾸는 넋이 스며 있는 보기글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물질에 몸바치고 물질에 매이고 물질에 얼이 빠진 채 흘러간다고 해도, 국어사전이란 이 모든 어지러운 흐름을 이겨내거나 거스를 수 있는 기운과 슬기를 담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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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1 11:23ⓒ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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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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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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