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싫어하지만 달러는 사랑하는 곳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 해 편 26 - 쿠바 26] 자전거 투어로 바라본 아바나 풍경들

등록 2008.12.08 10:26수정 2008.12.0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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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쿠바 국회의사당. 미국 워싱턴 국회 의사당의 쌍둥이 축소판.

쿠바 국회의사당. 미국 워싱턴 국회 의사당의 쌍둥이 축소판. ⓒ 문종성


J는 쿨쿨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아바나. 그 날 아바나의 정반대편인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우리가 엇갈렸던 날, J는 기차역이 아닌 그만 버스터미널로 가 버렸다. 그렇게 우린 엇갈린 채 만 이틀을 따로 보낸 것이다. 생판 처음 보는 터미널 직원에게 무슨 배짱에선지 쪽지와 함께 만약을 대비해 내 앞으로 50불 정도를 남겨두고 말이다. 사람에 대한 순수한 믿음,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J, 숙박 주소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아바나에 떨어져 기억 태엽을 뒤로 돌려 가까스로 숙소 주변의 영국대사관을 희미하게 캐치해 냈단다. 지금은 세상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는 녀석. 행여 깰까 조심히 한 번 웃는 걸로 해프닝을 마무리 한다.


a 포 모로 요새(Castillo del Morro)와의 사이에 대기시켜 놓아 만으로 침투하는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모로 요새(Castillo del Morro)와의 사이에 대기시켜 놓아 만으로 침투하는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 문종성


a 차이나타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라 그런지 쿠바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이 자주 눈에 띈다.차이나타운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중국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겉모습은 중국 레스토랑들과 낙서류의 벽화들이 즐비해 있다.

차이나타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라 그런지 쿠바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이 자주 눈에 띈다.차이나타운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중국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겉모습은 중국 레스토랑들과 낙서류의 벽화들이 즐비해 있다. ⓒ 문종성


쿠바 자전거 여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을 장식할 아바나의 속살을 더 맛보기 위해 짐들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앙상한 뼈대마냥 프레임과 바퀴만 남은 자전거를 들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뚫는다. 꿈결에 비단길을 휘젓던 J도 어느 새 찬물로 정신을 깨우고는 호연지기를 가다듬으며 며칠 만에 딱딱한 아스팔트 길 위로 올라섰다.  

아바나. 탈사회주의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이 도시를 거대하게 감싸고 있는 낭만을 한꺼풀만 벗겨보는 것. 그렇다면 천혜의 자연환경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빈국의 참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질까. 아님 더욱 쿠바다운 쿠바, 빈곤 속 풍요를 누리는 그들만의 삶의 체취가 흥건히 묻어나올까. 답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 속에 있다.

a 쿠바의 레스토랑엔… 맛과 멋이 있다.

쿠바의 레스토랑엔… 맛과 멋이 있다. ⓒ 문종성


a 여행자에게는 낭만인 구시가지 … 하지만 쿠바노들에겐 가난 그 자체다.

여행자에게는 낭만인 구시가지 … 하지만 쿠바노들에겐 가난 그 자체다. ⓒ 문종성


아바나는 단절됨이 묘하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웅동체형 도시다. 도시의 특색을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하기가 여간 '거시기'한 것이 아니다. 땅과 바다의 경계선을 갈라 해일을 막고 도로를 놓은 말레콘 방파제. 그 현장이 어쩌면 친환경주의 시대를 거스른 듯 하지만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파제란 수식어로 누구에게나 어머니 품 같은 안식처가 되고 있다.

a 시가 그리고 모자와 수염.

시가 그리고 모자와 수염. ⓒ 문종성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미화된 낡고 건조한 올드 아바나에서 옛 향수를 들이킨다. 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옆으로 젖혀보면 몸에 맞지 않게 급하게 코스모폴리탄의 옷을 껴입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아침 커튼을 열 때마다 스카이라인이 바뀌는 개발도상국에 비하면 외형적 성장은 느린 편이지만 아침 인사를 건넬 때마다 자본주의의 기름 냄새를 조금씩 풍기며 배시시 웃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생경스러워진다.


이중통화 적용. 외국인 전용 화폐인 CUC는 이제 더 이상 방문자만의 통화가 아닌 쿠바의 일부 서민들도 쓰는 화폐로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시골이나 중소도시에서 많이 통용되는 페소 단위 역시 당분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여 미국은 싫어하지만 달러는 사랑하는 이 섬나라가 통화개혁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이 두 화폐를 껴안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사회주의라면서도 교묘하게 사유재산의 차를 두고 있는 과도기에 정보에 취약한 세대가 이미 쿠바 경제 개혁의 뱃머리에 올라 탄 '경제적으로 선택된' 선발주자들과 궤를 같이 할 것인지 아니면 나라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 눈치 보는 상황들. 아바나의 시민들은 같은 하늘 아래 전혀 다른 두 가지 제도의 굴레 안에 살아가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1CUC로 24잔(1CUC=24페소)의 망고쥬스를 맛볼 수 있는 가게와 불과 몇 집 건너지 않아 한 끼에 10CUC이상 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묘한 불협화음도 그런대로 어우러져 가는 도시. 방파제 넘어 밀려드는 파도에 꾀죄죄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이빙을 하고, 바로 앞에 늘어선 호텔에서 깔끔하게 샤워를 할 수 있는 도시.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호기롭게 마차를 타고, 없으면 없는대로 뚜벅이 도보 여행으로 마음껏 유람할 수 있는 도시. 엄격한 여행자 통제시스템을 적용시키지만 돈과 때론 진실된 마음만 있으면 사실 어지간한 제도는 죄다 허물어 버릴 수 있는 도시.

a 펜화가 거리의 예술로 아바나의 거리를 한껏 아늑하게 만들어 준다.

펜화가 거리의 예술로 아바나의 거리를 한껏 아늑하게 만들어 준다. ⓒ 문종성


a 마차 땅에는 말, 하늘엔 비둘기. 아바나의 여행자 거리에서.

마차 땅에는 말, 하늘엔 비둘기. 아바나의 여행자 거리에서. ⓒ 문종성


나는 이 미묘하게 복잡한, 거칠면서도 소박한 매력이 있는 이 도시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전거로 달린다. 내 방식대로, 이 도시를 사랑하고 싶은 자유로 인해. 카리브 해의 강한 햇살과 바닷바람에 벗겨지는 피부마냥 아바나의 속살도 이제 그만 한 쪽으로 못을 박고 정체를 드러낼 때가 됐을까. 아니면 지금 이 이상하고도 재미있는 이원적 시스템을 혼돈기의 완충작용쯤으로 여기며 여전히 계속 이어갈까. 아마 그 대답은 피델에서 라울로 변한 카스트로 정부가 해 줄 것이다. 

a 노상 서점 체 게바라 아니면 장사가 안 될 정도. '체(Che)'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노상 서점 체 게바라 아니면 장사가 안 될 정도. '체(Che)'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 문종성


a 모히또 헤밍웨이가 그렇게 즐겨 마셨다는 칵테일. 이 잔을 비우고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로 작품을 써 나갔을까.

모히또 헤밍웨이가 그렇게 즐겨 마셨다는 칵테일. 이 잔을 비우고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로 작품을 써 나갔을까. ⓒ 문종성


다만 한 가지. 사회가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그리고 쿠바가 어떻든! 아바나 시민을 포함한 쿠바 국민의 춤과 낭만과 여유는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의 바퀴벌레가 사라지는 그 날까지 앞으로도 쭈욱. 그들 방식대로, 이 도시를 사랑하고 싶은 자유로 인해.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라이딩인아메리카 #아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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