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70) 볶은머리

[우리 말에 마음쓰기 577] '입술연지', '네나라시대'

등록 2009.03.12 12:01수정 2009.03.12 12:01
0
원고료로 응원

 

ㄱ. 볶은머리

 

.. 엊그제 장날에도 볶은머리를 노랑물까지 들이고 엉뎅이를 흔들며 조합 앞을 휘젓고 다니는 꼴새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는데 ..  《윤정모-들 (상)》(창작과비평사,1992) 21쪽

 

 아주머니나 할머니 들은 으레 "머리 볶았냐?" 하고 묻고, "응, 머리 볶았지." 하고 이야기합니다. "파마하러 간다"고 말씀하는 분과 함께 "머리 볶으러 간다"고 말씀하는 분이 있습니다. 동무들끼리도 '파마'와 함께 '머리볶기'라는 말이 두루 쓰였습니다.

 

 ┌ 파마(←permanent) : 머리를 물결처럼 곱슬곱슬하게 지지는 일

 │

 ├ 머리볶기 - 머리지짐

 └ 볶은머리 - 지짐머리

 

 '파마먼트'를 줄였다고 하는 '파마'입니다. 파마란, 머리카락을 곱슬곱슬하게 '지지는' 일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머리지짐'이나 '머리볶음'이 '파마'인 셈입니다. 파마한 머리란 다름아닌 '지진머리'나 '볶은머리'이고요.

 

 

ㄴ. 입술연지 - 립스틱

 

.. "야와라! 왠지 입술에 혈색이 돈다 싶더니, 이건 입술연지 아니냐!" "나도 고등학생인걸, 립스틱 정도는 다 발라요!" ..  《나오키 우라사와/서현아 옮김-야와라 (1)》(학산문화사,1999) 47쪽

 

 '혈색(血色)'은 '핏기'로 손보면 되는데, 이 자리에서는 "입술이 붉다 싶더니"나 "입술이 새빨갛다 싶더니"로 고쳐쓰면 어떨까 싶습니다.

 

 ┌ 입술연지(--臙脂) : 여자들이 화장할 때 입술에 바르는 붉은 빛깔의 염료

 ├ 립스틱(lipstick) : 여자들이 화장할 때 입술에 바르는 연지

 └ 루주(프 rouge) = 립스틱

 

 만화책에 나온 보기글에서 할아버지는 '입술연지'라 말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내미는 '립스틱'이라 말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만화책에만 나오는 이야기라기보다 우리 삶자락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랴 싶습입니다. 나이든 어르신은 '입술연지'이고 젊거나 어린 사람은 '립스틱' 또는 '루주'라 하고. 그러나 요즈음은 나이든 어르신 가운데 '입술연지'라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모두들 '립스틱' 아니면 '루주'일 뿐입니다. 영어 '립스틱'만으로도 모조라다고 느껴 프랑스말 '루주'까지 쓰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말로 이 화장품 이름을 지을 생각은, 또는 예부터 있어 온 우리 말 이름을 밝혀 쓰려는 움직임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화장품이라는 물건이 죄다 서양사람 얼굴과 몸매로 가꾸려는 꿈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런 화장품에 쓰는 말 또한 서양말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서양사람 얼굴이 되고 싶어서 하는 화장 아니겠습니까. 우리 얼굴이 되고자 하는 화장인 적이 있던가요? 우리 얼굴로 가꾸고 우리 모습을 빛내며 우리 모습을 사랑하는 화장인 적이 있던지요?

 

 바라는 대로 살게 되고, 살아가는 대로 말이 됩니다. 꾸미는 대로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대로 글이 바뀝니다. 우리가 옳게 살고자 애쓰면 옳은 말을 저절로 쓰게 되고, 우리가 그릇되게 사는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 글은 그릇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ㄷ. 네나라시대

 

.. 서력 기원후 4세기경부터 562년까지를 사국시대(四國時代)로 설정하여 한국 고대사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  《김태식-미완의 문명 7백 년 가야사 (1)》(푸른역사,2002) 23쪽

 

 '설정(設定)하여'는 '잡아'나 '세워'로 다듬고, '재구성(再構成)할'은 '다시 짤'로 다듬으며, '제안(提案)한다'는 '밝힌다'로 다듬습니다. 앞말과 묶어 "다시 짜길 바란다"로 풀어내어도 괜찮습니다.

 

 ┌ 사국시대(四國時代)

 ├ 사국시대

 │

 └ 네나라시대

 

 보기글을 보면 '사국시대'라 적은 다음 묶음표를 치고 '四國時代'라 적는데, 이렇게 적는다고 한결 잘 알아들을 수 있을는지는 모를 노릇입니다. 이런 글씀씀이라면 '삼국시대' 뒤에도 꼭 '三國時代'처럼 적어야 하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소설쟁이가 새로 옮겨서 내는 작품으로 '삼국지(三國志)'가 있는데요, 이 '삼국지'란 다름아닌 "세 나라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겐지가 살아온 이야기는 "겐지 이야기"이고, 옛날부터 이어온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이듯, 세 나라가 치고 받고 복닥거리던 이야기라면 "세 나라 이야기"라 할 때가 가장 알맞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말로 옮겨야 하니까요. 미국사람은 미국말로 옮기고 프랑스사람은 프랑스말로 옮겨서 쓰듯, 우리들은 우리 말로 '삼국지'를 옮기고 '사국'을 옮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2009.03.12 12:01ⓒ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살려쓰기 #토박이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5. 5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