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기 아름다운 '우리 말' (72) 바지런이

[우리 말에 마음쓰기 597] ‘잠 안 오는 약-잠약’, ‘일방-씻는방’

등록 2009.04.02 15:02수정 2009.04.0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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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바지런이

 

.. "너희들이 뭘 하려는지는 나도 몰라. 그렇지만 난 잠시도 게을리하고 있을 수는 없어. 말하자면 난 '바지런이'야. 그래서 한가할 틈이 없단다." 하고 삐삐가 말했다 ..  《아스트리드 린그렌/김인호 옮김-말괄량이 삐삐》(종로서적,1982) 17쪽

 

 삐삐는 게으를 틈이 없다고 합니다. 한갓지게 놀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늘 바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늘 바삐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삐삐는 스스로 '바지런이'가 됩니다.

 

 ┌ 바지런이 : 바지런한 사람

 ├ 부지런이 : 부지런한 사람

 ├ 바쁨이 : 바쁜 사람

 ├ 바빠쟁이 : 바쁘다 외치며 사는 사람

 └ …

 

 삐삐는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바지런이'이면서 '바쁨이'입니다. 바쁨이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사람하고 다릅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사람은 '바빠쟁이'입니다. 더없이 바빠맞아 딴짓은커녕 말 한 마디 느긋하게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삐삐는 바삐 움직이더라도 바빠맞기까지는 되지 않으려 합니다. 제 일을 즐기고 제 놀이를 신나게 펼칩니다. 이리하여 '바쁨이'까지는 되어도 '바빠쟁이'는 되지 않는 가운데, '바지런이' 자리에서 알맞춤하게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한자말로 친다면 '열심이'나 '열심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동무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하면 '도란이'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사람이라 하면 '싱글이'나 '벙글이'나 '싱글벙글이'라 해도 제법 어울립니다.

 

 

ㄴ. 잠 안 오는 약

 

.. 연거푸 이틀 밤, 사흘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일할 때에는 정신이 아득하여 저도 모르게 눈이 저절로 감긴다. 졸지 말고 밤일 잘하라고 주인아저씨가 사다 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한 다음 날에는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 "전태일 평전"에서 / 《이임하-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서해문집,2004) 131쪽

 

 '연(連)거푸'는 '거푸'로 손봅니다. '거푸'가 "잇따라 거듭"을 뜻하는 만큼 이 앞에 이와 같이 붙이면 겹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뜻을 겹으로 붙여 좀더 힘주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므로, 이럴 때에는 '거푸거푸'로 손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 수면제(睡眠劑) : 잠이 들게 하는 약

 ├ 최면제(催眠劑) = 수면제

 ├ 수면(睡眠) : 잠을 자는 일

 │

 ├ 잠오는약 / 잠약

 └ 잠안오는약 / 잠멎는약

 

 보기글은 노동자 전태일 님 글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960년대를 살던 전태일 님이 '잠 안 오는 약'이라고 이야기한 셈입니다. 잠이 안 오도록 하는 약을 단출하게 적으면 어떤 낱말이 빚어질까 궁금합니다. '잠멎음약'? '잠그침약'? '잠떼기약'? 어떤 이름을 붙여 보면 좋을까요?

 

 잠이 오도록 하려고 먹는 약은 한 마디로 '잠약'입니다. 한자말로 씌우면 '수면제'입니다. "수면이 들도록 하는 약"이라는 뜻에서 '睡眠 + 劑'입니다. 딱히 다른 뜻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어딘가 깊은 뜻이 배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잠 + 약'을 한자로 적으니 '수면제'일 뿐입니다.

 

 ― 잠멎음약 / 잠그침약 / 잠떼기약 / 잠잊음약 / 잠쫓이약 / …

 

 아주 그럴싸한 한 낱말을 얻어도 되지만, 꼭 어느 한 가지 낱말만 얻어야 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잠 안 오는 약'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잠쫓이약'이라 하거나 '잠잊음약'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잠없앰약'이라든지 '잠떨이약'이라 해도 돼요. 그러고 보면, '깸약'이라 해도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어떤 낱말을 빚어내든 우리 하기 나름이니까요.

 

 알뜰히 살려서 쓰는 몫도 우리한테 있고, 얄궂게 뒤틀어 놓는 몫도 우리한테 있습니다. 살려쓸 마음이 있으면 언제라도 살릴 수 있습니다. 살려쓸 생각이 없으면 이제부터라도 온통 망가질 수 있습니다.

 

 

ㄷ. 일방, 잠방

 

 지금 사는 집 말고 '작업실'을 하나 둘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책상만 하나 있고, 오로지 일에만 푹 빠져서 글을 쓰든 잠을 자든 뭐를 하든 한 가지만 할 수 있는 작은 쪽방을 얻어 볼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살림이 좀 괜찮았을 때이니까 했지, 살림이 팍팍하여 보증금 백만 원에 달삯 십만 원짜리 방 한 칸도 아쉬운 때에는 꿈조차 꿀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세 식구 단출하게 지낼 방 한 칸짜리 작은 방 하나를 볕 잘 드는 자리로 얻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살림도 꾸리고 일도 하고 하면 넉넉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 작업실(作業室) : 일을 하는 방

 └ 일방 : 일을 하는 방

 

 씻는방에서 빨래 한 점 하고 오면서 생각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씻는 방이니 '욕실(浴室)'이 아닌 '씻는방'이고, 잠을 자는 방이니 '침실(寢室)'이 아닌 '잠방'이나 '자는방'입니다.

 

 일을 하는 방이라면 '작업실(作業室)'이 아닌 '일방'이나 '일하는방'이라 해야 걸맞구나 싶고, 노는 방이라면 '놀이방'이나 '노는방'이라 하면 넉넉하구나 싶습니다.

 

 살림을 꾸려 '살림집'이지 '가정집(家庭-)'이 아니듯, 언제나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고, 사는 모습 그대로 이야기하면 넉넉합니다. 저부터 깜빡 잊고 지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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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2 15:02ⓒ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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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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