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보기에 곱고 아름답다 싶은 모습만 사진으로 담습니다. 곱거나 아름답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 마음이 ‘이런 모습은 담아야겠다’ 싶을 때 사진기를 듭니다.
최종규
배우기를 그리 배웠기에 배운 대로 따른다 할 터이나,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몸과 마음이 다른데, 다 똑같이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저마다 제 느낌과 생각과 마음을 담아야지, 어떤 주어진 틀에 맞추어 기계처럼 뽑아낸다면, 이를 놓고 그림이나 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라 하여도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찍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사진이라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마다 제 삶을 담는 사진이니까요. 제 삶을 담는 그림이요 제 삶을 담는 글이니까요.
모르긴 모르지만, 직업시인 직업소설가 직업정치인 직업화가 직업만화가 직업교사 직업출판인 직업사진가가 될 때에는, '직업 아닌 다른 즐거움'으로 내 삶을 채우거나 가꾸려는 마음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인데, '전업작가'가 되는 일은 그 사람한테 참으로 좋겠구나 싶지만 '직업작가'가 된다면 '좋아하는 일'이 아닌 '돈을 벌어 식구들 먹여살려야 하는 일'이 되면서 고단함과 괴로움과 짜증과 힘겨움을 느끼도록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전업작가'가 되면서 돈을 제법 만지는 분이 어느 만큼 있기는 있습니다만, 전업작가로 돌아서는 가운데 돈구멍을 키우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그러나 전업작가로 있을 때만큼 즐겁고 기쁘며 뿌듯할 때가 없다고들 입을 모읍니다. 벌이는 밑바닥이지만 온마음과 온몸을, 그러니까 온삶을 '내가 좋아하는 시나 소설이나 사진이나 그림이나 수필이나 연극이나 영화나 책이나 춤이나 노래'에 바칠 수 있어 '살맛이 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점봉산에는 산장이 없었다. 이곳에 산장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로소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웠다.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이었다. 카메라를 꺼냈다. 하지만 카메라는 작동을 거부했다. 기온이 낮아서 셔터가 얼어버렸나 보다. 이 멋진 풍경을 남길 수 없다니, 내 눈과 내 가슴에 담아야지. 나중에 생각날 때 난 무얼 볼까? 내 눈을 볼까? 내 가슴을 꺼내 볼까? 내 눈은 얼마나 맑아졌을까?"(239쪽)
남난희라고 하는 분이 스물을 살짝 넘겼을 때 태맥산맥을 한겨울에 홀몸으로 가로지르던 일을 돌이켜보며 쓴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1990)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 이 책이 곧잘 보이는데 여태까지는 눈여겨보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자주 보이는 책인데 나는 왜 한 번도 살짝이나마 들춰보려고 안 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집어들었는데, 뜻밖에도 깊고 너른 이야기가 담겨 아주 흐뭇하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