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33) 이력(履歷)

[우리 말에 마음쓰기 659] '음영(陰影)'과 '그림자-그늘'

등록 2009.06.04 11:43수정 2009.06.0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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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음영(陰影)

.. 아침 햇빛에 반사된 그 음영(陰影)들이 어떤 여인의 몸매를 연상시켜 참 멋있어 보인다 ..  《김보겸-철학 이전의 대화》(애지사,1971) 230쪽


'반사(反射)된'은 '튕겨진'이나 '되비친'으로 손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연상(聯想)시켜'는 '떠올리게 해'나 '생각나게 해'로 손질합니다. "어떤 여인(女人)의 몸매"는 "어떤 여인 몸매"나 "어떤 아가씨 몸매"로 다듬어 봅니다.

 ┌ 음영(陰影)
 │  (1) 어두운 부분
 │   - 음영이 지다 / 큰 소나무 아래로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  (2) 색조나 느낌 따위의 미묘한 차이에 의하여 드러나는 깊이와 정취
 │   - 음영이 풍부한 묘사 / 음영이 짙다 / 특징적인 음영의 선택이 중요하다
 │
 ├ 아침 햇빛에 반사된 그 음영(陰影)들이
 │→ 아침 햇빛에 되비친 그 모습들이
 │→ 아침 햇빛에 튕겨진 그 그림자들이
 │→ 아침 햇빛에 부딪힌 그 그늘들이
 └ …

소나무 밑으로는 '그늘'이 지거나 '그림자'가 진다고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빛이 적게 들어가는 곳이라면 '어두운' 곳이고요. 그림을 그릴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들은 "음영이 풍부한 묘사"를 한다기보다 "빛느낌을 잘 살린" 그림이라고 말하지 않느냐 싶어요.

보기글을 생각해 봅니다. 아침 햇빛에 되비치는 그 무엇이라 한다면 어떤 모습을 가리키려나 궁금합니다. 보기글처럼 적어야 어딘가 문학다운 느낌을 받을는지, 글을 쓰는 이라면 으레 이렇게쯤 적을 줄은 알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가씨 몸매를 떠올리게 한다는 빛느낌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글쓰는 사람이 사내라서 아가씨 몸매를 떠올릴까요. 아리따운 아가씨는 어떤어떤 몸매여야 한다는 틀이 따로 잡혀 있는가요. 햇빛에 비쳐 밝은 곳은 밝은 곳대로, 어두운 곳은 어두운 곳대로, 그예 있는 그대로 느끼고 나타내고 나눌 수는 없습니까.


 ┌ 음영이 지다 → 그늘이 지다 / 그림자가 지다
 ├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 음영이 풍부한 묘사 → 빛느님을 잘 살려 나타내기
 ├ 음영이 짙다 → 밝고 어두움이 또렷하다 / 밝음과 어두움이 깊다
 └ 특징적인 음영의 선택이 중요하다 → 돋보이도록 빛느낌을 잘 골라야 한다

그러고 보면 그림그리기를 하는 분들은 '음각(陰刻)'과 '양각(陽刻)'을 할 뿐, '오목새김'과 '돋을새김'을 하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오로지 '음양'만을 생각하고 찾고 붙잡습니다.


해를 따라 날짜를 헤아리면서 '양력(陽曆)'이라 하고, 달을 따라 날짜를 가누면서 '음력(陰曆)'이라 합니다. '해'를 보고 '달'을 보면서도 '해와 달'이라는 낱말을 넣어 우리네 날짜 헤아림을 하지 않습니다. 해를 해로 느끼지 않고 달을 달로 느끼지 않는다고 할까요. 밝음을 밝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까요.

우리 삶은 하나둘 꾸밈 많은 삶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삶자락을 시나브로 겉껍데기 잔뜩 뒤집어쓰는 삶자락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 삶을 나타내는 말은 꾸밈 많은 말이 되고 맙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삶자락을 보여주는 글은 겉껍데기 잔뜩 뒤집어쓰는 글로 바뀌고 맙니다.

우리 생각이고 우리 마음이고 우리 넋이고 우리 얼이고, 온통 겉핥기와 겉훑기에 매여 버립니다. 겉가죽과 겉치레에 빠지고 맙니다.

ㄴ. 이력(履歷)

.. 이 글에서는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통치 주요 수단으로 기능한 영어의 긴 이력履歷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  《손준식,이옥순,김권정-식민주의와 언어》(아름나무,2007) 73쪽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는 "영국이 식민지로 삼은 인도에서"로 다듬습니다. "통치 주요 수단으로 기능(機能)한"은 "통치 주요 수단 노릇을 한"이나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 큰힘을 낸"으로 손질해 봅니다. "추적(追跡)하고 분석(分析)하여"는 "좇고 살피며"나 "짚어 보고 돌아보며"로 고쳐 줍니다.

 ┌ 이력(履歷)
 │  (1)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
 │   - 이력을 쌓다 / 이력을 들추다 / 이번에 뽑은 경력 사원들은 이력이 화려하다
 │  (2) 많이 겪어 보아서 얻게 된 슬기
 │   - 이력이 나다 / 이력이 붙다 / 이 장사엔 웬만큼 이력을 지녔을 것이다
 │
 ├ 긴 이력履歷을 추적하고
 │→ 긴 발자취를 좇고
 │→ 긴 발자국을 되짚고
 │→ 긴 자국을 돌아보고
 └ …

'이력서(履歷書)'를 쓴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력서'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쓰는 '이력서'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요. 우리가 써낸 '이력서'를 받아드는 분들은 이 종이쪽에서 무엇을 읽어낼까요.

"이력을 적은 글"이니 '이력서'입니다. 그러면 다시금, '이력'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이라고 합니다. '내력(來歷)'이란 또 무엇인가 하면, "지금까지 지내온 경로나 경력"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경력(經歷)'이란 또다시 무엇인가 하면, "겪어 지내 온 여러 가지 일"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이력 = 내력 = 경력'인 셈이며, 하나같이 "겪거나 지낸 여러 가지"인 셈입니다. 저마다 여태 해 온 일을 가리키는 한자말이며,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내 발자국'이나 '내 발자취'입니다.

 ┌ 이력을 쌓다 → 여러 일을 해 보다 / 온갖 일을 겪어 보다
 ├ 이력을 들추다 → 해 온 일을 들추다 / 거쳐 온 일을 들추다
 └ 이력이 화려하다 → 엄청난 일을 해 왔다 / 발자취가 대단하다

국어사전에서 '발자취'를 찾아봅니다. "지나온 과거의 역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면서 '족적(足跡)'과 같은 말이라고 덧달아 놓습니다. '발자국'도 찾아봅니다. 딱히 다른 뜻은 없고, "발로 밟은 자리에 남은 모양"을 가리킨다고만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온 과거(過去)의 역정(歷程)"이라는 뜻풀이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겹으로 겹치기입니다. '과거'란 '지나온 일'을 가리키고, '역정'이란 '지나온 길'을 가리킵니다. 이 말풀이대로라면 "지나온 지나온 날의 지나온 길"이란 소리가 되고 맙니다. 어느 국어학자께서 이와 같은 말풀이를 달아 놓았는지 더없이 궁금한데, 얄딱구리한 겹치기 말풀이도 얄딱구리하지만, 우리 스스로 '발자취'와 '발자국'이라는 낱말을 알뜰살뜰 북돋우려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대목도 얄딱구리합니다.

 ┌ 이력이 나다 → 셈이 나다 / 슬기가 나다
 ├ 이력이 붙다 → 손에 잘 붙다
 └ 이력을 지녔을 것이다 → 머리가 트였으리라 / 생각이 깨었으리라

회사에서 "이력서를 내셔요" 하는 말을 고치기는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다만, "그동안 해 온 일을 종이에 죽 적으셔요" 하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봅니다. "발자취를 적으셔요" 하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해적이'나 '한 일 적이' 같은 말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내 발자취를 적어 봅시다"나 "이제까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봅시다"나 "살아온 이야기를 써 봅시다" 하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생각을 하면서 말하고, 생각을 북돋우면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말끔하고 싱그러운 말마디를 빚어낸다는 마음이 아닌, 아직 모자라고 어설프지만 하나씩 이루어 가는 말마디를 가꾸어 보자는 마음이면 넉넉합니다. 하루아침에 거듭나도 나쁘지 않으나, 오래오래 차근차근 가다듬어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면 즐겁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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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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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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