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27) 그녀 8

[우리 말에 마음쓰기 744] 그녀? 그년?, 레니와 리펜슈탈과 그녀, 여자 탤런트

등록 2009.09.02 11:26수정 2009.09.0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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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그녀? 그년?

.. 차 안에서 나는 그년에게 얘기했다 ..  《사진과평론》(사진과평론사) 2호(1980.10.) 205쪽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시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그년' 하고 욕을 한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이년-저년-그년' 하고 욕을 하고 싶은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나는 그년에게 얘기했다 (인쇄 잘못함)
 ├ 나는 그녀에게 얘기했다 (x)
 │
 ├ 나는 (아무개)한테 얘기했다 (o)
 └ 나는 그 사람한테 얘기했다 (o)

어느덧 스물여섯 해나 묵은 사진잡지 하나를 죽 보다가 '그년'이란 대목을 만나고 흠칫 놀랐습니다. 이 대목은 틀림없이 잘못 찍혔습니다. '그녀'라 넣어야 할 말을 '그년'으로 엉뚱하게 찍었습니다. 참말 어마어마한 잘못입니다. 이 잡지를 읽던 분들은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랐겠지요. 또는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웃을 분도 있었겠지요. 못 알아채고 지나가는 분도 있었을 테고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할 분이 있을 테며, 책을 찍다가 잘못 찍은 대목 하나를 놓고, 이런 일이 있으니 '그녀'를 쓰지 말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 삶과 문화에 없던 말을 이웃나라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탈이 나기 일쑤입니다.

ㄴ. 레니와 리펜슈탈과 그녀


.. 리펜슈탈은 직관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그녀는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자신의 머릿속에 완성된 영화가 들어 있었으며 … 레니는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  《오드리 설킬드/허진 옮김-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마티,2006) 22∼23쪽

"직관적(直觀的)으로 일을 진행했다"는 "직관에 따라 일을 했다"로 다듬을 수 있는데, "그때그때 느낌에 따라 일을 했다"나 "자기 느낌대로 일을 했다"로 풀어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프로젝트(project)가 처음 시작(始作)될 때부터"는 "일을 처음 할 때부터"나 "처음 일할 때부터"로 다듬고, "완성(完成)된 영화가 들어 있었으며"는 "다 찍어 놓은 영화가 들어 있었으며"나 "영화를 다 찍어 놓고 있었으며"로 다듬습니다. "예술적(-的)인 영화"는 "예술 영화"로 손질하고, '주장(主張)했지만'은 '말했지만'이나 '이야기했지만'으로 손질해 줍니다.


 ┌ 리펜슈탈은 직관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ㄱ) o
 ├ 그녀는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ㄴ) x
 └ 레니는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ㄷ) o

이 보기글을 살피면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독일사람을 놓고, 한 번은 '리펜슈탈'이라 하다가, 다른 자리에서는 '레니'라 하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그녀'라 합니다. 이래저래 살펴본다면, 이곳이든 저곳이든 '그녀'라 하지 말고 '리펜슈탈'이나 '레니'라고 하면 넉넉할 텐데요.

한국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종규'라 했다가 '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쓰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겠지면 어딘가 어설프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으로 말할 때에는 "어이, 최!" 하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글을 쓰면서 "최는 예술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처럼 적었다가 "종규는 제 느낌에 따라 일을 했다"처럼 적으면 앞뒤가 안 맞다고 느낍니다. 우리 글은 이렇게 적지 않으니까요. 우리 글투와 글결은 '최'라 하지 않고 '최 씨'라 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서양사람한테는 '레니 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씨'나 '님'은 거의 안 붙이고 이름이나 성 그대로만 말하곤 합니다.

이런 말버릇과 말투를 헤아린다면, 이 보기글에서 '리펜슈탈'이라 했다가 '그녀'라 했다가 '레니'라 하는 대목은 그리 엉뚱하다거나 잘못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들 이렇게 말하고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처럼 오락가락 붙이는 이름이 외려 글느낌을 살리며 글멋을 내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이 사람 레니 / 이 사람 리펜슈탈
 ├ 이이 레니 / 이이 리펜슈탈
 ├ 이 여자 레니 / 이 여자 리펜슈탈
 └ …

우리는 우리 문화를 가꾸기보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말과 글을 키우기보다는 서양책을 옮기고 서양 학문을 익히면서 서양말과 서양글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여느 자리에서 '쉬(she)'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는 참 쉽습니다. '그녀'조차 아닌 '쉬'니 '허(her)'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요즈음 우리들입니다.

우리 문화를 찾지 않고 우리 삶터를 지키지 않으며 우리 말글을 가꾸지 않는 우리들인데, '그녀' 한 마디야 참으로 대수로운 노릇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사람다움을 찾기 어렵고, 남자와 여자 모두 서로서로 좀더 아끼거나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ㄷ. 그녀 → 여자 탤런트

.. 한때 우리 나라의 모든 남자들로부터 결혼하고 싶어하는 인기 제1위의 여자 탤런트가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미소에 반하지 않는 남자가 없었다 ..  《박건호-시간의 칼날에 베인 자국》(춘광,1997) 73쪽

"우리 나라의 모든 남자들로부터"는 "우리 나라 모든 남자들한테"로 다듬습니다. "인기 제1위의 여자 탤런트"는 "인기 제1위인 여자 탤런트"나 "인기가 으뜸인 여자 탤런트"나 "가장 사랑받는 여자 탤렌트"로 다듬고, "표정(表情)과 미소(微笑)에"는 "얼굴과 웃음에"로 다듬어 줍니다.

 ┌ 그녀의 표정과 미소에
 │
 │→ 이이 얼굴과 웃음에
 │→ 이 여자 탤런트 얼굴과 웃음에
 │→ 이 사람 얼굴과 웃음에
 │→ 이녁 얼굴과 웃음에
 └ …

'여자 탤런트'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넣었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자 탤런트'라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까닭은 없을 테지요. 한 번 되풀이하든 두 번 되풀이하든 말이 더 길어지지 않습니다. 한두 마디 길어진다 한들, 말썽거리가 된다든지 이야기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지지 않습니다. 그저,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입니다.

그냥 '여자 탤런트'라고 하면 됩니다. 같은 말을 또 하는 일이 내키지 않다면 '이 여자'이든 '이 사람'이든 '이이'든 '이녁'이든 하고 넣으면 됩니다. 아니면, 여자 탤런트 이름을 밝혀 주셔요.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 탤런트 이름을 또렷이 밝히면서 차근차근 글을 써 나가면 됩니다.

내 생각을 내 글에 차분히 담고, 내 뜻을 내 글에 수수하게 담습니다. 내 넋을 내 글에 알뜰살뜰 담고, 내 얼을 내 글에 슬기롭게 담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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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익히기 #글다듬기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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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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