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42) 가훈(家訓)

[우리 말에 마음쓰기 750] '아무개가 쓴 작품'과 '아무개의 작(作)'

등록 2009.09.12 11:46수정 2009.09.1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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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가훈(家訓)

.. 길 건너에 있는 샐러리맨 계층 자식들하고는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가용족들의 가훈(家訓)으로 되어 있어 ..  《채규철-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한터,1990) 96쪽


'샐러리맨(salaried man)'은 '봉급쟁이'나 '월급쟁이'로 다듬습니다. 또는 '달삯쟁이'로 고쳐쓰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안 된다는 것이"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나 "안 된다는 다짐이"로 손봅니다.

 ┌ 가훈(家訓) : 한 집안의 조상이나 어른이 자손들에게 일러 주는 가르침
 │   - 우리 집은 '정직과 용기'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
 ├ 자가용족들의 가훈(家訓)으로 되어 있어
 │→ 자가용족들이 가훈으로 걸고 있어
 │→ 자가용족들 집안에서 가르치고 있어
 │→ 자가용족들 집에서 가르치고 있어
 └ …

집식구한테 가르치는 말을 한자로 옮겨 '가훈'이라고 합니다. "집(家)에서 가르친다(訓)"를 있는 그대로 적은 한자말 '가훈'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둘레에서나 학교에서나 익히 들었습니다.

집에서는 '가훈'이고, 학교에서는 '교훈(校訓)'이며, 학급에서는 '급훈(級訓)'이었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말하니 우리들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말은 생각하지 않거나 못했으며, 집이며 학교며 교실에서며 으레 한자로 몇 마디를 적는 '가르침말'을 흰 종이에 붓글씨로 적어서 높은 곳에 붙여놓곤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사훈(社訓)'이라 할 텐데, 군대에서는 무어라 이름을 붙일까요? 나라에서는, 또 지자체 정부에서는, 또 동네에서는 어떤 이름으로 이런 말을 가리키려고 할까요?


여러 가지 가르치는 말과 함께, 나 스스로 나를 가르치는 말이라면서 '좌우명(座右銘)'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기관이나 관청에서는 '무슨무슨 헌장(憲章)'이라고 내걸면서, 당신들 스스로 무엇을 지키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국민학교에 들 때나 중고등학교에 들 때나, 시험 성적이 가장 좋았던 아이가 구령대에 올라 '선서(宣誓)'을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운동회를 할 때에도 이런 '맹세(盟誓)'하는 말을 쪽지에 적은 다음 한 손을 들고 외치곤 했습니다. 모두들 무엇무엇을 지키겠다고 하는 말을 하는 셈이었고, 무엇무엇을 지키겠다는 말이란 바로 '다짐'입니다.


 ┌ 좌우명 ↔ 내 다짐
 ├ 국민교육헌장 ↔ 사람을 가르치는 다짐
 ├ 가훈 ↔ 집다짐
 ├ 교훈 ↔ 학교다짐
 ├ 급훈 ↔ 학급다짐
 └ …

말흐름을 가만히 짚어 봅니다. '訓'에서 비롯하는 말이 '約束'을 거치고 '座右銘'과 '憲章'을 지나 '宣誓'에 닿다가 '盟誓'로 이어집니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낱말로 이어질는지 궁금한데, 이리로 오든 저리로 가든 '다짐'으로 가닿는 일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이야기하나 뜻풀이는 '다짐'인데,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다짐한다고 읊는 일은 몹시 드뭅니다.

워낙 '가훈-교훈-급훈'이라 써 왔기에 하루아침에 '집다짐-학교다짐-학급다짐'처럼 쓰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뜻 그대로 쓰는 매무새가 낯설거나 어설프다고 하여도, 우리 스스로 안 써 버릇했기 때문에 낯설거나 어설픈 줄을 느끼려 하지 않는 우리들이라고 봅니다. 꾸준히 쓰는 가운데 좀더 알맞거나 싱그럽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바탕으로 한결 빛나고 고운 새 말마디를 일굴 수 있습니다.

'가훈-교훈-급훈'을 그대로 쓰는 일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이 테두리에만 머물 까닭은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가훈-교훈-급훈'에 머물기 때문에, 이렇게 한글로만 적는 한자말에 그치지 않고 자꾸자꾸 묶음표를 붙이고 '家訓-校訓-級訓'을 달아 놓아야 말뜻이 또렷하거나 말느낌을 살린다고 여기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보기글은 통째로 손질해서 "길 건너에 있는 월급쟁이네 아이들하고 놀아서는 안 된다고 자가용족들 집에서 가르치고 있어"쯤으로 다시 쓸 수 있습니다.

ㄴ. 작(作)

..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투신자살을 선택하는 고독한 소녀의 비극―토마스 푸드 작(作) 《한숨의 다리》―은 ..  《스즈키 주시치/김욱 옮김-엘리노어 마르크스》(프로메테우스 출판사,2006) 101쪽

'절망(絶望)'은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다듬습니다. 또는, 뒷말과 이어 "가슴이 무너지면서"나 "무너진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로 다듬어 봅니다. "투신자살(投身自殺)을 선택(選擇)하는"은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으로 손보고, '고독(孤獨)한'은 '외로운'이나 '쓸쓸한'으로 손봅니다.

 ┌ 작(作) : (작자의 이름 뒤에 쓰여) '작품', '제작', '저작'의 뜻을 나타내는 말
 │   - 이광수 작의 〈무정〉 / 혜경궁 홍씨의 작인 《한중록》 /
 │     이 작품은 김 감독의 1957년 작이다
 │
 ├ 토마스 푸드 작(作)
 │→ 토마스 푸드 작품
 │→ 토마스 푸드가 쓴
 │→ 토마스 푸드가 지은
 └ …

"이광수 작의 〈무정〉"은 "이광수가 쓴 〈무정〉"이나 "이광수 소설 〈무정〉"으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작인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으로 고쳐쓰고요.

국어사전 보기글을 보니, '作'이 쓰일 때에는 글쓴이나 지은이 이름 뒤에 토씨 '-의'를 붙입니다. '작품'이나 '저작'으로 고쳐야 한다는 '作'이라 할 테지만, "토마스 푸드의 작품"처럼 잘못 적을 수 있어요. 그러니, 아예 '쓴'이나 '지은'이나 '만든'이나 '펴낸'이나 '엮은' 같은 말을 넣어 주면 한결 낫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그러지거나 그르칠 일이 없습니다.

"이 작품은 김 감독이 1957년에 내놓은 작품이다"라 하면 됩니다. "이 작품은 김 감독이 1957년에 선보인 작품이다"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작품은 김 감독이 1957년에 만든 작품이다"라 해도 괜찮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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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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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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