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43) 정사(情事)

[우리 말에 마음쓰기 760] '화신(花信)'과 '꽃소식-꽃편지'

등록 2009.09.24 11:27수정 2009.09.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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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정사(情事)

 

.. 로재크 씨의 많은 정사(情事)를 샅샅이 알고 있는 로재크 부인은 그들의 별거 이래 그녀 자신도 그 같은 행위에 파묻혀 있음을 남편에게 알릴 정도로 뻔뻔스러웠다 ..  《케이트 밀레트/정의숙,조정호 옮김-성의 정치학 (상)》(현대사상사,1976) 25쪽

 

 보기글 첫머리는 "로재크 씨가 수없이 정사를 하는 줄"이나 "로재크 씨가 수없이 정사를 벌이는 줄"쯤으로는 손질해 줍니다. "그들의 별거(別居) 이래(以來)"는 "둘이 따로 산 뒤로"나 "둘이 따로 지내고부터"로 다듬습니다. '행위(行爲)'는 '짓'이나 '일'로 손보고, "알릴 정도(程度)"는 "알릴 만큼"으로 손봅니다.

 

 ┌ 정사(情事)

 │  (1)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한 일

 │  (2) 남녀 사이에 벌이는 육체적인 사랑의 행위

 │   - 정사를 나누다 / 정사를 벌이다

 │

 ├ 로재크 씨의 많은 정사(情事)를

 │→ 로재크 씨 바람기를

 │→ 로재크 씨가 수없이 바람을 피우는 줄을

 │→ 로재크 씨가 딴 여자를 수없이 만나는 줄을

 │→ 로재크 씨가 딴 여자와 수없이 노는 줄을

 └ …

 

 남자와 여자가 벌인다고 하는 '정사'를 '情事'로 적는다고 하여, 좀더 또렷하게 알거나 환하게 깨달을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한자말 '정사'는 국어사전에 모두 스물일곱 가지 실려 있는데, 다른 '정사' 또한 한자를 밝혀 준다고 해서 어떤 말을 가리키는 줄 헤아리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글쟁이나 말쟁이인 분들은 한자말 '정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 한자말을 두고두고 사랑합니다. 이 한자말을 언제까지나 아끼면서 곁에 둡니다.

 

 예부터 익히 써 온 말을 살피지 않을 뿐더러, 받아들이지 않고 즐겨쓰지 않습니다. 누구나 손쉽고 살갑게 쓰던 말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기껍게 느끼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 삶으로 삭이며 빚어낸 토박이말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쓰지 못하는 한편, 새롭게 달라지거나 거듭나는 모습에 따라 새로운 낱말을 빚어내는 슬기를 꽃피우지 못합니다. 우리한테 우리 말을 가꾸는 마음가짐이 옅어지는 가운데, 우리가 새로 받아들일 바깥말은 무엇이고 우리 깜냥껏 곰삭이며 들여올 나라밖 문화와 문물이 무엇인지를 걸러내는 몸가짐이 스러집니다.

 

 ┌ 바람 피우기

 ├ 바람기

 ├ 사랑놀이

 ├ 딴 (여자/남자)와 놀기

 └ …

 

 차라리 미국말 '섹스'를 넣는다면 다릅니다. 이제 이 미국말은 나라밖 말이라고 느끼지 않으면서 두루 쓰고 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섹스'라고 하지, '섹스(sex)'처럼 적는 일은 없습니다. 말밑이 어떻게 되어 있든, 이 낱말을 입으로 말할 때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우리가 쓸 만한 말이니까요.

 

 '정사'이든 '정사(情事)'이든, 어쩌면 넌지시 이야기하고 슬그머니 말하려는 뜻에 따라서 이런 낱말을 쓰는지 모를 노릇인데, '바람 피우기'라 하거나 '사랑놀이'라 한다 해서 넌지시와 슬그머니를 나타내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이 핑계를 대고 저런 말로 둘러대면서 우리 말을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구실을 붙이고 저런 토를 달면서 우리 글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묶음표까지 쳐야 하는 말을 버젓이 쓰면서, 가방끈 길이를 자랑하거나 내세웁니다. 묶음표를 치고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말을 쓰면서, 스스로 말매무새와 생각매무새와 삶매무새가 얼마나 헝클어져 있는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ㄴ. 화신(花信)

 

.. 남녘 화신花信이 하루 25킬로미터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접할 때마다 ..  《이문재-이문재 산문집》(호미,2006) 79쪽

 

 "25킬로미터 속도(速度)로"는 "25킬로미터 빠르기로"로 다듬고, "북상(北上)하고"는 "북으로 오고"나 "북으로 퍼지고"로 다듬습니다. "뉴스(news)를 접(接)할"는 "소식을 들을"로 손질해 줍니다.

 

 ┌ 화신(花信) : 꽃이 핌을 알리는 소식

 │   - 서서히 북상하는 화신 / 화신을 전하다

 │

 ├ 남녘 화신花信이

 │→ 남녘 꽃소식이

 │→ 남녘 꽃편지가

 │→ 남녘 꽃내음이

 │→ 남녘 꽃잔치가

 │→ 남녘 꽃이야기가

 └ …

 

 꽃이 피는 소식이니 '꽃소식'입니다. 꽃소식은 따뜻한 곳에서 추운 곳으로 차츰차츰 퍼집니다. 소식은 '편지'로 건네지거나 '글월'로 날아갑니다. 꽃이 피며 풍기는 냄새이니 '꽃냄새'나 '꽃내음'입니다. 꽃소식과 함께 움직이는 꽃내음입니다. 꽃이 활짝활짝 피며 온 들판을 뒤덮으니 '꽃잔치'입니다. '꽃마당'이 펼쳐지기도 하고 '꽃누리'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꽃소식과 꽃내음은 머잖아 온 나라에 꽃잔치가 이루어지리라고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우리는 남녘에서 북녘으로 '꽃이야기'를 살며시 띄웁니다.

 

 ┌ 서서히 북상하는 화신 → 천천히 올라가는 꽃소식

 └ 화신을 전하다 → 꽃소식을 알리다

 

 글을 마무리지으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몇 마디를 붙여 볼까 합니다. 이 보기글을 쓴 분은 시를 좋아합니다. 시를 읽고 쓰고 나눕니다. 시를 좋아하는 분으로서 꽃소식을 '화신'으로 적거나 '화신花信'처럼 적을 때 한결 시맛이 나고 글맛이 꽃피우리라 느꼈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참말 '화신'이나 '화신花信'이어야 시맛이나 글맛이 살아날까요? '꽃편지'나 '꽃소식'이라 하면 시맛이나 글맛을 북돋울 수 없을까요? 글을 만질 뿐 아니라 글에 꽃기운을 담아내는 분들이라면, 우리가 만지거나 다루거나 껴안는 말과 글을 한껏 일으켜세우며 알차고 아름다이 가다듬는 데에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9.24 11:27ⓒ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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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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