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라는 일본 선생, 뺨을 얼마나 때렸던지...

[인생을 듣다3] 여든 살 박복례 할머니

등록 2009.11.18 20:22수정 2009.11.26 16:5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a

막내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 우양


"병원에 다녀오다가 노랑머리 애들(서양들)을 만났어. 내가 쳐다보니 '하이' 하고 인사를 해. 그래서 나도 '하우아유' 그랬지. 그랬더니 얘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거야. '웰아유프롬' 그랬더니 '푸롬어메리카' 그러데. 학생이래. 한국말 공부하러 온 학생들. 걔들 둘이서 내 팔을 양쪽으로 부축해 계단을 내려다 주더라구. 재미있었지."


기초 영어. 한문 연습, 한글 연습... 할머니의 작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책들. 누가 보는 책이냐고 물으니 당신이 공부하기 위해 사다 놓은 책들이란다. 여든, 도수 높은  돋보기를 써도 책 속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연세에 요즘도 공부를 하신다.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박복례 할머니(80·호적상 1933년, 실제 1930년생). 그래서 일본말과 일본글은 좀 배웠지만 이후로는 배울 기회가 없어 서른이 다 되어서야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치게 되었다. 어떤 사정이 할머니의 공부기회를 빼앗은 걸까.

유년시절 기억조차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가물가물하시다는 할머니. 할머니는 1930년 충청남도 대전 인동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땐 일본말만 배웠어. 학교에서 무심코 조선말 쓰다가 걸리면 얼마나 두드려 맞았는지 몰라. 잊어버리지도 않아. 무라카미라고 일본선생이 있었는데 조선말을 쓴다고 뺨을 얼마나 모질게 때렸던지 실신을 했을 정도라니까. 깨어나 보니 뺨이 이렇게 부어 올랐더라구. 지독한 놈 같으니... 그래도 공부는 잘했어. 일등은 못했지만 2등은 꼭 했거든. 그래서 부반장도 하고 그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박복례 할머니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장사를 시작하셔서 풍요롭진 않아도 궁핍하지는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어려움을 몰랐지. 그땐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서 점심을 굶는 애들도 많았어. 그러면 내 도시락 먹으라고 주기도 하고, 신발도 떨어진 거 신고 오는 애가 있으면 내 신발을 벗어주기도 하고, 추위에 떠는 애들 보면 옷도 벗어 주고 그랬어. 그러면 어머니가 '아유~ 우리 딸이 나보다 낫네' 하며 칭찬해 주셨지. 어머니도 어려운 사람들 쌀도 퍼주시고 많이 그랬거든."

a

20대 후반의 박복례 할머니 ⓒ 우양


할머니에게 첫 불행이 닥친 것은 14살 무렵.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다.


"초등학교 6학년에 해방을 맞았지. 중학교 가려고 세일러복까지 다 마련해 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 몸이 약해 내 위로 아이 일곱을 내리 잃으셨거든. 나와 내 동생 둘만 간신히 살아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모(새엄마)가 들어왔는데 어찌나 못 됐는지. 그 여자가 재산 다 말아먹고 도망가고. 그 바람에 아버지도 시름시름하다 돌아가시고...우리 세 남매 고아가 된 거야."  

중학교 가면 입으려고 마련해 둔 세일러복을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채 소녀 가장이 되어 버린 할머니. 부모님이 남겨주고 간 두 남동생은 누구보다 소중한 혈육이었다. 하지만 그 두 동생마저 지금은 세상에 없다. 막내 동생은 월남전에서 전사했으며 큰 동생 역시 할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동생들 하고 살다가 스물셋에 결혼을 했어. 시집간다고 집을 나서는데 막내 동생이 얼마나 우는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구. 그렇게 시집이라고 간 게 마석이야. 농사일 하는 남편인데 3대 독자였지. 아들을 낳아줘야 하는데 내가 아이를 낳아주지 못한 거야. 첫 아이 임신 중에 뭐가 화가 났는지 술을 먹고 들어와 남편이 배를 걷어차는 바람에 아이도 잃고 자궁도 다 망가지고... 그때 의사가 더는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구..."

그 후 남편은 씨받이라는 조건으로 여자를 구해 딸을 낳았지만 한집에서 본처와 씨받이가 함께 살게 하며 본처를 괴롭혔다.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게 된 할머니.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3년 전까지 할머니는 법적 혼인 상태였다고 한다.

"스물 셋에 시집가서 스물여섯에 나왔으니 3년 살았네. 다른 여자를 집에 들여서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같이 살아. 그래서 집을 나오면서 이혼을 해 달라고 했지. 그런데 이혼은 못하겠다는 거야. 사정사정해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데 그게 다 사기였던 거지."

a

"하우두유두~" 할머니는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어떻게 지내시나? ⓒ 우양


후처와 남편 사이에 낳은 아이가 할머니의 아이로 출생신고까지 되어 있음을 알고 이에 대한 법정투쟁을 시작. 3년인 2006년에야 비로소 이혼상태임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할머니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소녀가장이 된 후, 한글을 따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국 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한 남편이 허위 이혼장을 만들었고 그에 속은 할머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독거노인으로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을 하려다 허위이혼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지. 그래서 여기저기 안 찾아다녀 본 데가 없어. 남편의 후처도 수급자로 돈이라도 타 먹으려니 이제 와서 다시 혼인신고를 하고 싶지 않은 거지. 재판장을 붙잡고 막 하소연을 했어.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이야. 결국 이겼지만 그거 쫓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한글을 알았으면 그런 사기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지금도 공부를 해. 뭐든 배우면 좋잖아. 난 노는 것보다 공부 하는 게 좋아. 영어도 배우고, 한글도 배우고, 한문도 배우고... 아! 컴퓨터도 배웠어."

스물여섯에 이혼을 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남의 식모살이부터, 채소장사, 양말공장 여공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할머니. 서울 삼양동 니트 공장에서 검수원을 하며 착실히 돈을 모아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말죽거리 공터에 작은 보도블록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때 역시 한글을 알지 못해 답답한 때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하고 일하러 들어 온 애들한테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배웠어. 그때 내 공부 가르쳐 주던 '김군'이던가? 참 일도 잘하고 착실했는데... 한 2년 하고 그만 뒀어. 개발하는 바람에 땅도 비워 줘야 하고 또 다른 공장에서 월급을 더 많이 준다니까 애들이 다 그리로 가더라구. 그땐 작지만 집도 하나 장만했었는데 나중에 장사가 잘 안되고 월급이 밀리니 어떻게 해. 집을 팔아서 애들 밀린 월급 다 해주고 나는 또 맨몸으로 나왔지 뭐."

a

사용한 편지봉투를 재활용한 할머니의 영어공부 메모장 ⓒ 김혜원


사실 할머니 집에는 얼마 전까지 컴퓨터가 있었단다. 할머니가 다니시는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던 강사분이 할머니 열의에 감동해 사용하던 컴퓨터를 직접 설치해 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몇 달 사용하다 보니 매달 나가는 인터넷 이용료와 전기요금 등이 적지 않아 고물장사에게 6천원을 받고 팔아버리셨단다.

"그게 다달이 돈이 나가더라구. 몇 만 원 되니 부담되잖아. 그걸로 한글공부도 하고 영어공부도 하고 좋았지만 늙은이가 뭐 한다고 한 달에 몇 만 원씩 돈을 들여가며 컴퓨터를 써. 얼마전에 팔았어. 그래서 모기 잡는 전기매트를 샀지. 이 동네 모기가 아주 극성이거든."

지금도 치매 예방 겸 영어나 한글, 한문공부를 꾸준히 하신다는 할머니. 공부한 것 좀 보여 달라고 부탁을 하니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자꾸만 감추신다.

"에그 창피해. 보지 마. 글씨가 어디 글씨 같아야지. 엉망인데 뭘 자꾸만 보자구 그래. 창피해 죽겠네."

종이도 아까워 주워오신 폐지나 사용한 편지지의 빈곳을 이용하시는 할머니. 혹시라도 잊을까 적어둔 이메일 주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어 속담도 한 줄 적혀 있다.

"노 뉴스 굿 뉴스. 알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구. 잊어버릴까봐 적어 놓는 거야. 그리고 한번 씩 읽어보고... 외국사람들하고 말 좀 해보고 싶은데 그런 자리가 있어야지. 그냥 내 꿈이야. 영어를 많이 배워서 외국 사람하고 영어로 말 해보는 거 말이야. 늙었다고 못 할게 뭐 있어. 지금도 몸만 아프지 않으면 얼마든지 배우고 싶지. 배우는 건 끝이 없잖아."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속수무책 당하고만 살아야 했던 할머니. 할머니에게 배움이란 단지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지식이 아닌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인권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할머니의 배움에 대한 열의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호기심이 생긴다. 스물여섯에 이혼, 지금까지 혼자 살아오시면서 외롭진 않았을까. 그래서 재혼 생각은 안 해 보셨을까?

"난 외로운 거 모르고 살았어. 결혼해서 3년 살아보고 말았지만 워낙 남편한테 데어서 그런가 남자라면 겁부터 나고... 외롭긴 뭐가 외로워. 혼자 사는 게 깨끗하고 좋지. 등 긁을 때가 좀 외로우려나? 하하하." 

호탕하고 재미있으신 할머니. 유머감각도 보통 이상이다. 영어공부를 하려고 <민병철영어>라는 회화 책을 사두었지만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열어보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내는 할머니. 할머니의 건강이 얼른 좋아지셔서 묵혀 둔 영어책을 다시 꺼내 드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박복례 할머니는?
강서구 화곡동에 전세로 거주. 2007년경 허리를 다치신 이후 허리가 심하게 굽고 무릎관절도 좋지 않아 보행이나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음. 3년 전 법적 이혼을 인정받았으며, 최근에 와서야 수급자로 선정 매월 기초생계비를 지원받음. 그 외 매월 사회복지법인 우양으로부터 쌀 7kg을 지원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박복례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개의 눈을 가진 모래 속 은둔자', 낙동강서 대거 출몰
  2. 2 국가 수도 옮기고 1300명 이주...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3. 3 '삼성-엔비디아 보도'에 속지 마세요... 외신은 다릅니다
  4. 4 장미란, 그리 띄울 때는 언제고
  5. 5 "삼성반도체 위기 누구 책임? 이재용이 오너라면 이럴순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