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77)

― '병명은 형의 그것과 같았다' 다듬기

등록 2010.01.18 13:32수정 2010.01.1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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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그것' : 형의 그것

 

.. 그 후 테오는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형의 그것과 같았다 ..  <빈센트 반 고흐/박홍규 옮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2009) 782쪽

 

 '그 후(後)'는 '그 뒤'나 '그런 뒤'로 다듬고, "병원에 입원(入院)했다"는 "병원에 들어갔다"로 다듬습니다. '병명(病名)'은 '병이름'으로 손질합니다.

 

 생각해 보면 "병원 입원"은 "학교 입학"처럼 입에 굳은 말씨입니다. 이 같은 말씨를 굳이 다듬을 까닭이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 본다면 "병원에 들어가"고 "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면 넉넉합니다. "병원에 가"고 "학교에 간다"고 하면 됩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테오는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갔다"로 다듬어도 잘 어울립니다. 글흐름은 글흐름대로 알맞게 살피면서, 우리 말 문화는 말 문화대로 슬기롭게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형의 그것과 같았다

 │

 │→ 형과 같았다

 │→ 형하고 같았다

 └ …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던 지난날, 여러모로 놀랐습니다. 그때까지는 나라와 겨레마다 서로 다른 말을 쓰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나타낼 수 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말 하나를 새로 배우는 일이란 꽤나 오래도록 품을 많이 들여야 한다고 느끼는 가운데, 내가 이 나라에서 한국말을 배우며 자랐다는 대목이 고마웠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그 나라 말을 쓰면서 살았을 테고 생각이며 삶이며 아주 달랐겠지요.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내가 태어나 자란다는 생각은 거의 할 수 없었습니다. 나한테는 꼭 이 나라 이 삶터 이 문화 이 말이 아니면 너무 어렵다고만 느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되면서, 또 고등학교에 들어서 1학년 2학년 3학년이 되는 가운데, 이런 마음은 차츰 옅어집니다. 영어 배우기가 익숙해지고 영어로 된 책을 곧잘 읽을 수 있은 뒤부터, 이웃나라 문화를 익히고 삶을 배우며 나라밖 사람을 만나는 일이 딱히 두렵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 모르게 '우리 말투'가 아닌 '영어 말투'로 우리 말을 하곤 했으며, 저뿐 아니라 제 동무들도 '우리 말투'가 아닌 '어설프고 어줍잖은 번역 투'가 되었든 '영어 말투'가 되었든, 제 말투를 하나하나 잃어 갔습니다.

 

 ┌ 병이름은 형과 같았다

 ├ 병은 형하고 같았다

 ├ 병이름은 형이 걸린 병과 같았다

 ├ 형이 걸린 병과 같은 병이었다

 └ …

 

 우리는 왜 "형의 그것과 같았다" 같은 어이없는 영어 말투로 우리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왜 우리 말투로 영어를 옮겨내지 못하고, 어설픈 말투를 곧이곧대로 쓰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어지럽히거나 뒤흔들고 있을까요?

 

 "병이름은 형이 걸린 병과 같았다"처럼 말하던 매무새를 왜 우리 스스로 버려야 했을까요? 개구리 올챙이 적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저런 영어 말투가 우리 말투보다 한결 낫거나 알맞거나 좋거나 멋있거나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지난날에는 외국말을 다루는 사람들 몇몇만 이런 영어 말투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외국말을 잘하는 사람이건 잘 못하는 사람이건 이런저런 영어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읊습니다. 신문과 방송뿐 아니라 문학책과 어린이책에도 이런 영어 말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이 나라 아이들을 걱정하는 자리에서도, 우리 삶터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거침없이 영어 말투가 튀어나옵니다. 아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영어를 들먹이곤 합니다. 아예 알파벳으로 영어를 죽 적어 놓고 '우리 삶터를 뜯어고치거나 가다듬으려고 하는 좋은 생각'이라며 내세우기까지 합니다.

 

 ┌ 형이 걸렸던 같은 병이었다

 ├ 형이 걸린 병을 동생도 걸렸다

 ├ 형과 동생이 같은 병에 걸렸다

 ├ 동생도 형과 같은 병이었다

 └ …

 

 우리 말이 가장 훌륭한 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말이 있는지 없는지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어가 가장 훌륭한 말인지는, 중국말이 가장 뛰어난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적잖은 이들은 '우리들로서는 한자가 참 쓰기 좋다'고 말씀하는데, 한자를 아는 분들한테는 누구나 한자가 쓰기 좋지 않겠습니까? 영어를 아는 분들로서는 누구나 영어가 쓰기 좋을 테고요.

 

 똑똑하건 어리석건, 이 나라에서 이곳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나라 누구나 쓰는 말이 가장 쓰기 좋습니다. 배운 이는 배운 대로 하는 말이 가장 수월할 테고, 못 배운 이는 못 배운 대로 하는 말이 가장 홀가분할 테지요. 그런데, '못 배운' 이나 '적게 배운' 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배운' 이는 없다고 느낍니다. 나아가, '배웠다'고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고 한다면 참말로 무엇을 배우는 셈일까 궁금합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데, 배운 이들은 왜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면서 더 널리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한다는데, 어이하여 그토록 많이 배운 사람들은 스스로 더 고개를 숙이고 눈높이를 낮추면서 내 이웃과 동무하고 더 널리 뜻과 생각과 마음을 나눌 손쉬운 말마디와 글줄을 못 펼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배웠기 때문에 배운 티를 내며 잘난 척하는 말마디를 늘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배웠기 때문에 배운 솜씨를 뽐내며 스스로 더 낮추는 가운데 한결 손쉽고 깨끔하며 아름답다고 느낄 말마디를 헤아리고 찾아내면서 생각을 펼쳐야 올바릅니다.

 

 괜히 "민중한테 찾아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구태여 "현장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배운 분들이 가리키는 '민중'은 누구이고 '현장'은 어디입니까. 배운 분들이 쓸 말이란 무엇입니까. 배우셨으니 배운 말을 써야겠습니까. 배웠기 때문에 '덜 배우거나 적게 배운' 사람들하고 어깨를 나란히 할 말을 써야겠습니까. 배운 만큼 우리 스스로 더 깊고 너르게 돌아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1.18 13:32ⓒ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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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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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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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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