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을 꺼라?

이주여성의 기발한 조어에 포복절도하다

등록 2010.03.23 17:11수정 2010.03.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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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5일. 늦은 밤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다가 이른 새벽에 귀국하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국에 온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하오네 집을 방문했습니다. 하오는 결혼이주여성인 틔이의 조카입니다.

 

피곤하고 몸살 기운이 있는데도 하오네 집을 방문한 이유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느라 베트남에 있을 동안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던 틔이가 공항에서 건네준 물건들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틔이는 결혼한 지 7년이 넘는 결혼이주여성인데, 친정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서 잠시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그간에 고모가 돌아가시면서 귀국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틔이는 귀국하는 기자에게 비닐봉지로 꼭꼭 싸서 무엇인가를 맡겼었습니다. 맡긴 물건이 뭔지 달리 묻지를 않았지만, 그것이 베트남 음식일 거라는 것쯤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 와서 풀어놓은 봉지에서는 베트남 원두커피와 차, 쌀국수를 만들 때 쓰는 쌀종이(rice paper) 외에 찹쌀과 고기를 다져 넣어 바나나 잎으로 둘둘 말아 만든 베트남 전통 떡인 듯싶은 음식이 들어 있었습니다.

 

음식을 풀자마자, 하오는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내왔습니다.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잠시 거실을 둘러보았습니다. 예전과 달리 곳곳에 한글과 베트남어가 병기된 쪽지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싱크대 위, 방문, 보일러 스위치 위, 창문, 냉장고, 벽지 등 곳곳에 붙여 놓은 쪽지들을 보면서 하오가 나름대로 한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 베트남 커피 뜨거운 커피를 냉수가 든 대접에 담아 식히면서 마신다.

베트남 커피 뜨거운 커피를 냉수가 든 대접에 담아 식히면서 마신다. ⓒ 고기복

▲ 베트남 커피 뜨거운 커피를 냉수가 든 대접에 담가 식히면서 마신다. ⓒ 고기복

하오는 한국어 공부를 매주 일요일 이주노동자쉼터에서 두 시간 공부하는 것 말고는 독학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모가 집에 있을 때는 가르쳐 줄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이모가 베트남에 가면서 하오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전과 혼자 공부하기에는 벅찬 한국어 교재뿐입니다.

 

그런 하오가 적어 놓은 쪽지들을 보며 '기발한 조어'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방문에 붙여놓은 쪽지는 명령문이긴 했지만, 어법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을 열어라."

"문을 닫아라."

 

a 방문에 붙인 쪽지 명령문으로 적어 놨다.

방문에 붙인 쪽지 명령문으로 적어 놨다. ⓒ 고기복

▲ 방문에 붙인 쪽지 명령문으로 적어 놨다. ⓒ 고기복

한편 보일러 스위치 위에 붙여놓은 쪽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장판의 전기를 꺼라."

"뜨거운 물을 꺼라."

 

a 뜨거운 물을 꺼라 보일러 위에 붙인 족지

뜨거운 물을 꺼라 보일러 위에 붙인 족지 ⓒ 고기복

▲ 뜨거운 물을 꺼라 보일러 위에 붙인 족지 ⓒ 고기복

아마 보일러를 끄라는 말을 적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판을 따뜻하게 하고, 뜨거운 물을 나오게 하는 '보일러'라는 단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찌됐든 뜻은 통한 셈입니다.

 

쪽지들을 가리키며 공부하기 위해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맞다? 맞다?"며 말끝을 올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제대로 썼냐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줬습니다. 스스로 공부하기를 마다않는 하오가 '보일러'라는 단어도 알게 되고, 어법에 맞는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2010.03.23 17:11ⓒ 2010 OhmyNews
#이주여성 #베트남 #한국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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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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