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 아저씨의 고백... 정들었지만 돌아섰다

[시골 한의사, 미국을 달리다⑧] 미국 자전거 횡단 제22~24일

등록 2012.08.30 14:39수정 2012.08.3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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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

Knott county historical society in Hindman, KY


마당 한쪽에 마련된 텐트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근사한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다. 여기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historical society)는 B&B(Bed and breakfast)로 숙박과 아침 식사를 함께 제공하기 때문이다. 천사 같은 데이빗(David) 아저씨는 특별히 저녁 식사도 마련해 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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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Historical Society B&B(Bed & Breakfast)에서 차려준 식사는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그야말로 컬러 푸드(color food)였다. ⓒ 최성규


제이콥(jacob)은 분빌(booneville)로 떠나려 한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출발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여유가 지나치다. 메인주에서 버지니아주로 내려오면서 하루 80마일씩 달렸다는 사실을 미뤄봤을 때 시간에 쫓기지 않는 주행 요령이 있나 보다.

그는 지난 2주간의 여정을 겪으며 짐만 되는 물건들을 선별했다. 우체국 택배로 한 뭉치 보낸 덕에 자전거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클릿 슈즈도 갖추고 있다. 클릿(Cleat)은 페달과 신발을 결착시켜 주는 장치다. 이 장치를 사용하면 페달을 밟았다 올리는 과정에서도 쉼 없이 힘을 전달할 수 있다. 두 발이 항상 힘을 쓰기에 속도가 빠라질 뿐만 아니라 오르막길에서도 편하게 주행할 수 있다.

"10마일 지점마다 10분씩 쉬어줘야 해. 그래야 근육이 풀려 다시 힘이 생기거든."

휴식은 시간낭비라고 여겨 무조건 페달질만 하던 초보에게 크나큰 깨우침이다. 이걸 몰라서 매번 열심히는 달리지만 저녁 늦게 도착했던 걸까.


그토록 갈망하던 동료 라이더와의 동행이 눈앞에 있다. 함께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재충전을 위해 일주일에 하루는 전혀 달리지 않는다는 제이콥의 말이 떠오른다. 육체는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남보다 나를 위한 선택을 취한다. 그와 나는 다시 하루 차이가 됐다.

오전 11시가 돼서야 출발한 제이콥이 바삐 페달을 밟고 있을 무렵, 나는 한가로이 인터넷을 즐기고 데이빗 아저씨는 주방 가득한 접시와 음식물 쓰레기를 치운다. 잔디 깎기, 세탁, 청소, 설거지, 고양이 먹이 주기... 손님은 한 명인데 할 일은 산더미다.


전화 받고 찾아온 한 남자... 종합병상 따로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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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버크홀즈(Jacob Birkholz) 몬태나 주 출생인 제이콥은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부터 라이딩을 시작했다. 버지니아 주까지 남하한 후 나와 같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타고 있다. 여행 초반 하루 100마일씩 달렸다는 그는 이제 일주일에 한번씩 쉬어주는 요령을 터득했다. ⓒ 최성규


허리를 삐끗해 통증이 남아있는 그에게 침 치료를 제안했다. 상부 요추 주위 척추기립근에 통증이 있고, 허리를 끝까지 구부릴 수 없는 상태. 한의학적으로 근육·인대·건의 문제는 경근병(經筋病)에 속하는데, 상하접경의 원칙에 의거해 수태양소장경의 후계혈(後谿)과 족태양방광경의 찬죽혈(攢竹)에 침을 놨다. 그 상태로 동기법(動己法 : 통증 부위를 자발적·수동적으로 운동시킴)을 시행한다.

처음 접하는 한방 치료와 궁합이 맞는지 예상보다 상태가 호전됐다. 신기해하며 허리를 여러 차례 굽혀보던 데이빗 아저씨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찰리(Charlie)도 좀 봐줄 수 있겠어?"

"No problem." 문제는 없다. 이내 소설 속 호걸같이 우락부락한 찰리가 왔다. 사실상 종합병상이나 다름없었다. 188/80의 높은 혈압이 나타나 간이혈압계까지 지니고 다닌다. 어깨의 회전근개(Rotator cuff : 어깨를 회전시키는 4개의 힘줄 다발)는 엉망이며 오른 팔꿈치 뼈는 젊을 적 부서졌다.

3년 1개월간의 공중보건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 진맥과 근육 테스트. 오른쪽 어깨관절은 외전 외회전 굴곡 운동시, 왼쪽 어깨관절은 내전 내회전 신전 운동시 문제가 있다.

혈자리를 하나씩 취하며 치료를 하니 그 전보다 관절의 움직임이 개선됐다. 지속적인 관리가 중요한데 일회성 치료가 아쉬울 뿐이다.

여기 놋 카운티(Knott county)에는 마땅한 병원이 없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마을 보건소는 시원찮고, 그나마 가까운 병원은 16마일가량 떨어져 있다. 종합병원은 렉싱턴(lexington)까지 약 120마일을 가야 한다. 의료 접근성이 유난히 떨어지는 켄터키 주는 찰리처럼 아파도 참아야 하는 환자들이 꽤 많다. 카운티에 유일한 카이로프랙터(chiropractor)에게 환자가 몰리는 이유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사라진 찰리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손에 술병 하나를 들고 말이다. 문샤인(moon shine). 그의 말에 따르면 1790년대부터 시작된 켄터키 주 전통의 가양주(家釀酒)다. 주재료는 옥수수인데, 공장에서 만들면 이 맛이 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세 명의 사나이가 모였다. 제이콥이 빠진 자리는 휘영청 밝은 달빛이 메운다. 양주잔 속으로 문샤인이 쪼르르 빨려 들어간다. 달을 마신다. 독하다. 그러나 맑다. 약간의 탄성과 함께 내뱉는 숨결은 뜨겁다.

윤오영의 수필 <달밤>의 정취가 켄터키 시골에서 펼쳐졌다. 총각 김치 대신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농주 한 사발 대신 문샤인을 들이키고 달을 바라보았다.

"음 달이 참 밝군."

6월 6일

Hindman, KY - Booneville, KY
65 mile ≒ 104.6 km

회감(回甘). 녹차를 입에 머금었을 때 처음에는 쓰지만 나중에 올라오는 단맛. 차의 깊은 향미처럼 곱씹을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장소가 있다. 데이빗 아저씨가 운영하는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다. 25달러의 저렴한 숙박비로 샤워·세탁·잠자리·두 끼의 푸짐한 식사가 제공된다. 인간미 넘치는 교감은 덤이다.

정들자마자 이별이다. 아저씨가 차려주는 마지막 식사가 눈앞에 있다. 수십 마리의 고양이도 배가 고팠는지 바닥에 놓인 먹이를 오물오물 먹어치웠다.

"여행 끝나면 여기로 돌아와."

고개는 끄덕이지만 우리는 안다.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우리는 불확실성으로 긍정한다.

동지들의 체취... 재회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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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17년째 자전거 여행객들을 상대로 편안한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집 안에만 붙박혀 지내는 뚱보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실 애완동물이 아니다. 데이비드 아저씨는 먹이를 찾아 모여든 고양이들을 내치지 않았고 어느덧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 최성규


캣맨(cat man)을 뒤에 남겨두고 나그네는 떠나간다. 가팔랐던 언덕을 다시 내려간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산맥의 끝자락이 순탄치 않을 라이딩을 암시한다. 드워프(Dwarf)에서 벅혼(Buckhorn)까지 가려면 높은 산 두 개를 넘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안장에서 내려 자전거를 밀었다. 제이콥처럼 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한 가득이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 분빌(boonevile)을 10마일 남겨두고 길이 평탄해진다. 대평원에서 말을 타고 시원스레 질주하는 느낌이다. 꾸준히 시속 15마일을 유지하며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다.

숙소는 프레스비테리언(presbyterian : 장로교) 교회에서 제공하는 캠핑장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제이콥이 다녀간 흔적이 방명록에 선연하다. 6월 3, 4, 5일 모두 기록이 있다. 하루 간격으로 내 앞을 차례로 달리는 라이더들. 꾹꾹 눌러 쓴 볼펜의 흔적에 동지들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 있다. 언젠가 만날 날을 고대하며 적막한 풀밭에 캠핑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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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neville Presbyterian church(분빌 장로파 교회) 교회에서 제공하는 무료 캠핑장에 거처를 정했다. ⓒ 최성규


6월 7일 목요일

Booneville, KY - Berea, KY
49mile ≒ 78.8km

경사가 심해 도저히 페달을 밟을 수 없을 때는 자전거를 오른편에서 끌고 오른다. 차량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중간에 철제 방어막을 세우는 셈이다. 왼쪽 핸들바에 있는 백미러의 특성상 왼편에 서면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했다. 상식이다.

믿어왔던 사실이 흔들리면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힌드만(hindman)에서 색다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고민에 빠졌다. 데이빗 아저씨가 두꺼운 생물도감을 펼쳐 보이며 주의사항을 일러줬던 것이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조심해야 할 놈이 있어. Copperhead(황갈색 독사)와 Rattle snake(방울뱀). 보통 독을 가진 놈들은 이렇게 머리가 삼각형으로 돌출돼 있지. 어디서부터 몸통인지 머리인지 구별 못 할 정도로 미끈하게 빠진 놈들은 독이 없는 경우가 많지. 

들판에서 방울 소리가 나면 바로 멈춰야 해. Rattle snake가 꼬리를 흔드는 중이니까. 다행히 이놈은 위협이 있기 전까지 먼저 덤비지는 않지.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0.5초 안에 사람 키만큼 점프해서 목을 물어버려. 혹시 물리고 살 가능성이 있냐고? 15분 내로 병원으로 갈 수만 있다면 목숨은 부지할 거야.

Copper head는 소리를 내지 않아. 아주 공격적이지. 다행히 Rattle snake보다 독의 위력이 1/3인데다가 무릎 높이만 점프한단 말이야. 수풀이 우거진 갓길은 피하는 게 좋아."

자전거를 경계로 왼쪽과 오른쪽 모두 만만치 않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어둠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짐승들이 근처에 있다.

망망대해서 배를 만난 것 같은 느낌,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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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Cohosh(승마) 켄터키 주에는 집 앞뜰이나 뒷뜰에서 이렇게 약재를 말리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인들도 한약재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한약의 효능을 아직 신뢰하지 않기에 팔기만 할뿐 자신이 먹지는 않는다. 블랙 코호시(Black cohosh)는 예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생리통 식물로 불리며 애용되어 왔다. 우리나라 약재명으로는 '승마(升麻)'라고 하는데 독을 풀고 열을 내려서 피부의 발진 등을 치료한다. ⓒ 최성규


스릴과 긴장감 넘치는 길 위를 조심스레 지나간다. 조금만 참자. 인고의 시간이 지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닿는다. 내일 해로즈버그(harrodsburg)에 도착하는 순간, 근처 윌모어(wilmore)에 사는 사촌형이 혜성처럼 등장할 예정이다.

오늘 행선지를 미리 알려야겠다. 띠리리 하는 수화음과 함께 간만에 듣는 모국어가 귓전을 때린다. 네? 하루라도 빨리 오라구요? 베뢰아(berea)?

하루라도 일찍 와서 쉬라는 사촌형의 제안. 베뢰아(berea)를 관통하는 Interstate 75번과 SR 21번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조우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후 6시까지는 여유 있는 시간. 평소대로만 가면 1~2시간 남을 정도의 거리다. 허나 사람은 간사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무엇이든 해내지만 느슨하게 풀어주면 능력 발휘를 전혀 하지 않는다. 베뢰아 근처에 이르러 얼마 남지 않은 약속 시각을 보고 황급히 속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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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고대하던 사촌형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망망대해에서 배를 만난 격이랄까. ⓒ 최성규


햄버거 가게에 이르렀을 무렵, 하얀색 밴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창문이 내려오고 반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와우, 승민형!"

우리는 서로 얼싸안았다. 형수님은 물 한 병과 함께 인사를 건넨다. 함께 따라온 아이들은 깊이 잠들었는지 뒷좌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전거와 여행자를 실은 차는 다시 인터스테이트(Interstate)로 진입한다. 며칠간의 파라다이스가 펼쳐질 윌모어(wilmore)를 향해.
#미국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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