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어른이 엄마 찾아 삼만리라니

[시골한의사, 미국을 달리다] 자전거 횡단 54일~56일

등록 2012.11.15 14:56수정 2012.11.1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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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토요일

McDonald flats campground, CO - Hot sulphur spring, CO
37 mile = 59.2 km


빗방울이 텐트를 두드린다. 빗소리에 깼지만 선뜻 나가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멍하니 누워 있었다. 히스패닉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왁자지껄 떠든다. 어라, 쟤들은 젖어도 상관없나? 지퍼를 내리고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간밤에 내리던 비는 약해졌고 바람만 세차게 불어닥쳤다.

비는 여행자 입장에서 귀찮은 존재다. 허나 콜로라도 지역주민에게는 반갑기 그지 없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왈도 스프링스를 비롯해 주 전역에서 산불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건조한 편인 콜로라도에 오랜만에 양일(兩日)간 비가 내렸다.

텐트를 접고 짐을 정리하다 한 미국인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 밤늦게 온 모양이다. 히스패닉 가족 캠핑차량 뒤에 주차된 그의 지프 트럭.

"저 가족이랑 친구예요?"
"나 혼자 왔어. 같이 주차해서 일행처럼 보였나 보네."

롭 소콜(Rob Sokol). 러시아 이름인데 고조할아버지가 러시아 출신이다.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재무회계 일을 하는데 낚시 겸 휴양차 그린 마운틴 저수지(green mountain reservoir)에 들렀다. 미국을 횡단 중이라하자 그는 갑자기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필요한 게 뭐야? 말해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오트밀, 트레일 믹스(trail mix, 여행자가 손쉽게 열량을 보충할 수 있도록 견과류, 말린 과일, 초콜렛 등을 섞어놓은 스낵), 해바라기 씨 봉지, 젤 타입 고체연료(불이 바로 붙어 열을 내뿜는 젤 연료)를 손에 쥐여준다. 말을 섞다 보니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비슷한 감정을 느꼈음인지 그가 선수를 쳤다.


"물 끓일 테니까 오트밀이나 먹고 가지?"

근처 테이블에서 좌판이 벌어진다. 롭은 스토브와 냄비, 프라이팬, 계란, 각종 티백에다 손난로까지 갖다놓는다. 자동차 캠핑족과의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게 미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대부분 첫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가감없이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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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소콜 아저씨 슬렁슬렁 낚시대를 드리우더니 단번에 월척을 낚는 실력을 보여준다. ⓒ 최성규


"안 좋은 쪽으로 과하달까. 탄산음료, 패스트 푸드를 많이 먹고 차에 너무 의존하죠. 운동도 안 하면서. 전기도 많이 쓰던데요. 현관 불을 왜 낮에도 켜놓는지 몰라."

그는 바로 수긍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주범, 욕심 많은 월스트리트 금융계 사람들과 그는 달랐다. 내가 화두를 하나 던지면 '롭'이 받아서 자신의 견해를 길게 풀어놓았다. '양극화'라는 단어를 던졌더니 이제 미국에는 아메리칸 드림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회사에서 보너스를 줘. 매번 핑계를 대지. 돈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몇 백 달러 밖에 못 준다. 그랬던 놈들이 CEO한테는 수백만 달러를 지급한다구. 정치도 마찬가지야. 돈이야. 일반인들 시급이 7달러거든. 워싱턴에서 정치하는 놈들은 그저 가만히 있어도 시간당 몇 백 달러가 들어와.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임대료가 수입의 25%를 차지하게 되면 브레이킹 포인트(breaking point, 임계점)지. 현실에서는 그걸 가뿐하게 넘어. 평균 33%를 건물주에게 갖다 바쳐. 35%를 넘게 되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임대료지. 내가 아는 녀석은 40%까지 내더군. 그게 뭐야. 뼈 빠지게 벌어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지."

얘기하다 말고 아저씨가 양해를 구했다.

"낚시대 좀 확인하고 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잠시 후 그는 손바닥만한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난다. 낚시대를 드리운 지 10분도 채 안 돼 얻어진 결실이다. 어제 덴버에서 왔던 삼대(三代)가 하루 종일 허탕 친 호수에서 말이다.

그가 손을 씻는다. 그 와중에 비누칠까지 했는데 1리터 병의 반의 반 밖에 쓰지 않았다. 나는 그를 검소하다고 치켜세웠다. 그리고 화장실 얘기가 튀어나왔다. 변기 물 한 번 내리는 데 5갤론의 물이 소요된다. 최신식 변기는 3갤론만으로 충분하지만 이 또한 적은 양은 아니다. 필요없는 낭비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오트밀을 해 먹고 차를 끓이며 설거지하고 손을 씼는 데 반 갤런의 물도 다 못 썼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는 썩고 오전 10시가 훌쩍 넘었다. 내일 덴버로 돌아가는 롭(Rob)은 제안을 했다.

"하루 그냥 쉬어. 나랑 같이 낚시나 하자."

귀가 솔깃한 제안이지만 흔들릴 내가 아니다. 요즈음 주행거리가 짧아 일정에 맞추려면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아쉬움을 감추며 그가 이메일을 적어주었다. RSokol2080. 2080이라. 치약 이름도 아니고 뭐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9시부터 6시 근무(점심시간 1시간 포함)를 한 경우 일 년 간의 총 노동시간이라고 한다. 기본적인 삶의 질을 누리기 위한 근로조건이다. 실제 미국 노동자들은 연 평균 2400시간 일하며 저소득층으로 갈수록 근무시간은 늘어난다.

자신만의 사업체를 꾸려 종업원들을 돕고 싶다는 롭 아저씨가 성공하기를 빌었다. 그는 1갤론 물통에서 남은 물을 내게 주며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타고 그는 낚싯대로 향한다.

히니(heeney)를 지나 다시 SR 9번으로 들어섰다. 갓길이 없는 이차선을 60마일의 속도로 위협하며 주행하는 차량들. 가끔 아찔한 상황도 펼쳐진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 한 대가 제 앞의 차를 추월하려 할 때. 양쪽 차선에서 한꺼번에 나를 향해 돌진하는 차들 앞에서 자전거 라이더는 전전긍긍할 뿐이다. 추월하던 차량이 다시 제 차선으로 건너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운전자가 핸들을 쥔 채 위로 치켜들던 가운데 손가락을. 검은 썬팅 아래로 선명하게 비치는 모습에 화가 솟구쳤다. 그때 뒤 따라오던 차들이 나를 긴장시키며 아직 끝나지 않은 위험을 상기시킨다. 화낼 여유가 없다. 이미 지나간 일. 마음을 진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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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설펄 스프링스(hot sulphur springs) 가는 길 왼편으로 기찻길이 보인다. ⓒ 최성규


하늘이 또 심상치 않다. 비가 내릴 조짐이 보인다. 목표를 수정한다. 후지에 패스를 앞두고 페어플레이(fair play)에 베이스 캠프를 차렸듯, 윌로우 크리크 패스(willow creek pass)를 목전에 두고 핫 설펄 스프링스(hot sulphur springs)에 머물기로 한다. 도착 시간은 오후 4시. 시티 파크로 들어선다. 한 명의 라이더를 만난다. 리컴번트(누워서 타는 자전거)를 탄 레이(Ray) 아저씨다.

"하늘 좀 봐라. 몇 분 안 있어 비가 올 거야."

몇 마디 붙여보지도 못 한 채 서둘러 텐트를 쳤다. 천막 안으로 짐을 옮기자마자 쏟아지는 빗줄기. 텐트 속에 기어들어가 빗소리를 음악 삼아 눕는다. 그나저나 비가 그쳐야 저녁을 먹는데. 고민의 시작이자 마무리는 항상 먹거리다.

7월 8일 일요일

Hot sulphur springs, CO - walden, CO
61 mile = 97.6 km

콜로라도의 마지막 관문 윌로우 크리크 패스(willow creek pass)를 향한다. 이번 일정에는 아쉬운 속사정이 감춰져 있다. 며칠 전 버지니아 샬로츠빌(Charlottesville)의 브레비(brevy)아저씨는 내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부모님이 콜로라도 에스테스 파크(estes park)에 사셔. 너 그랜비(granby) 지나간다며? 거기서 50마일만 가면 돼. 굉장히 반가워하실 거야."

문제는 왕복 100마일을 자전거로 직접 가야 한다는 사실. 한창 바쁜 부모님이 직접 마중 나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출국 날짜까지 서둘러야 하는 나로서 이틀 동안 코스를 벗어나기가 못내 부담스러웠다. 결국 포기하고 내 갈 길을 간다.

윌로우 크리크 패스까지 10마일을 남겨두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2마일 전부터 장대비가 온 몸을 적신다. 피할 방도가 없어 묵묵히 언덕을 올라간다. 안경에 달라붙은 물방울 파편들이 시야를 가린다.

후지에 패스에 비하면 어린 아이 장난이지만 체감 난이도는 같다. 그러매 살짝 머리를 굴려 생각에 잠겨 본다. 3000ft의 급경사를 오르든 작은 언덕을 오르든 힘들기가 매한가지라면 목표를 조금 더 높여보는 건 어떨까? 시간은 순리에 따라 저절로 흐르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인고의 과정도 끝이 날 것이다 우리는 시지푸스처럼 끝없이 돌을 굴릴 필요는 없다.

또 하나의 continental divide인 윌로우 크리크 패스를 넘는다. 어두운 하늘은 다시 맑아지며 서광이 비친다. 단순한 지리적 경계를 기점으로 하늘이 변하니 이것 또한 천지의 오묘한 조화다.

급격한 내리막을 타고 가면서 바람이 흠뻑 젖은 몸을 때린다. 머리를 감아 물기 젖은 머리카락이 헤어 드라이기의 냉풍을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랜드(Rand)를 지나면서 화창했던 날씨는 다시 거무튀튀해지기 시작한다. 또 비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이 정도면 변덕도 도가 지나치다.

천공에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한데 가운데 동그랗게 뻥 뚫린 공간으로 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춘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기 힘들 정도다. 환한 햇살 아래로 지나가면 훈훈하지만 먹구름 지대로 진입하니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싸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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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Walden) 가는 길 그랜비(Granby)에 있다는 브레비 아저씨네 집을 포기하고 월든으로 방향을 튼다. ⓒ 최성규


갑작스런 강풍까지. 월든(walden)에 도착할 때까지 사계절을 모조리 맛볼 수 있었다. 시티 파크에 도착해 캠핑을 준비했다. 파고라(Pergola)로 들어서니 젊은 친구가 인사를 건넸다. 로스 먼로(ross munroe)는 뉴욕 출생이지만 지금은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산다. 우연하게도 내가 미국횡단을 시작한 도시다.

그는 정석대로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밟지 않았다. 리치몬드에서 워싱턴 DC, 피츠버그로 올라갔다가 시카고, 세인트 루이스를 거쳐 파밍턴(farmington)에 도착하여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 합류했다. 그 이후 콜로라도 푸에블로에서는 곧장 덴버로 북진한 다음 록키산맥 국립공원(Rocky mountain National park)를 지나 그랜비(granby)로 건너 오면서 다시 코스로 복귀한 것이다.

로스(Ross)는 ACA 패키지 팀의 휴이(Huey) 아저씨와도 안면이 있었다. 둘은 2년 전에 여행하다 만났다. 한 달 정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텍사스에 진입했을 때 아저씨는 여행을 포기했다.

"왜 그만뒀대?"
"돈을 너무 많이 썼거든. 무겁다고 캠핑 용구는 하나도 안 챙겨왔어. 날마다 모텔에서 자고 세 끼는 레스토랑에서 먹었어."

모텔비가 적어도 50달러, 식사비가 30달러. 잡비 포함해서 하루에 100달러씩 길에다 깔고 다니면 제 아무리 부자라도 감당해 내지 못할 터였다. 그는 가끔 어이없이 돈을 쓰기도 했다. 상당한 난코스를 지날 무렵이었다. 그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그 경치를 포기하기 싫었던 휴이는 차를 렌트해서 기어코 그 땅을 밟고야 말았다.

그게 바로 ACA 패키지에 참가한 이유였다. 88일 동안 7200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허나 그의 전력을 참작한다면 혼자만의 미국 횡단에 비해 오히려 싸게 먹힐 것이었다.

문득 로스가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임상 간호사(Nurse Practitioner ; 보통 의사가 하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간호사)로 일하는데 7월 9일부터 15일까지 6박 7일 동안 와이오밍 주 잭슨에 머무른다. 급하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스는 일정을 앞당겨서라도 어머니를 만나겠다는 맘을 먹은 것이다. 9일인 내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달려 잭슨에 도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382.5(하루 평균 76.5)마일을 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여정.

이른바 엄마 찾아 삼만리다. 이탈리아에서 1886년 발표된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Edmondo De Amicis)의 원작 동화인 <쿠오레(Cuore)-사랑의 학교>에는 단편 동화가 하나 실려 있다. 바로 '아페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Dagli Appennini alle Ande)'. 1976년에는 일본에서 이를 각색하여 52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엄마를 찾아 떠나는 '마르코'의 긴 여정을 다루고 있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전 세계를 돈다는 내용이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던 명작이었다.

이번에는 '애팔래치안 산맥에서 록키 산맥까지'라고 이름 붙이면 될까?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조연으로라도 참여하고 싶은 맘이 생겼다. 가슴 속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덤으로 시간도 벌고 길동무도 생기게 된다. 5일간의 일정을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로스는 기꺼이 받아주었고 우리는 한 팀이 되었다. 그럼 나는 마르코가 데리고 다니던 하얀 원숭이 역할인가?

7월 9일 월요일

Walden, CO - Saratoga, WY
69 mile = 110.4 km

뼛속 깊이 치미는 한기에 새벽잠을 깨고야 말았다. 소포로 보내버린 에어매트가 몹시 그립다. 얇은 천 쪼가리는 대지의 여신이 내뿜는 냉기를 당하지 못하고 몸을 감싸던 잠의 신 힙노스(Hypnos)마저 도망치고 말았다. 오전 3시. 안간힘을 쓰며 새우잠을 다시 청해보았다.

해가 다시 뜨고 온기가 조금씩 느껴질 무렵 마을 전광판은 화씨 48도(섭씨 8.9도)를 가리킨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캔자스에서 100도 넘는 무더위에 시달렸는데. 그만큼 여행이 진척되었다는 증거를 몸으로 느낀다. 함께 자던 자전거 여행자들도 모두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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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지는 아침 날씨 화씨 49도(섭씨 9.4도)를 가리키는 전광판 ⓒ 최성규


우리가 묵었던 월든(walden)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저서 '월든'과 동일하다. 이 책은 자연주의자 '헨리'가 1845년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면서 소박하고 자급자족했던 2년간의 생활을 담고 있다. 대자연을 예찬하는 동시에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곳곳에 서려있다. 법정 스님은 그를 존경했고 미국 땅을 밟을 때마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의 콩코드에 위치해 있는 월든 호숫가에 한 번씩 들렀다.

짝퉁 월든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사라토가(Saratoga)에서 보자며 로스는 먼저 출발하고 제리(Jerry)와 레이(Ray) 아저씨는 20마일 덜 가서 리버사이드(riverside)에 묵을 계획이다.

콜로라도를 벗어나 와이오밍으로 접어든다.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에는 '진정한 서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갓길에서 공사 중이던 인부 한명이 말을 건넸다.



"사라토가까지는 별일 없을 거야. 그 다음에 강을 건너고부터는 조심해야 돼."



본격적으로 와이오밍에 접어들게 되면 뱀이 많아진다. 게다가 풀과 구별 못할 정도라 하니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마지막 20마일을 남겨두고 몸은 물 먹은 솜마냥 더디기만 하다. 콜로라도 록키 산맥에서 목표치 이하로 주행하다 보니 어느덧 관성에 젖어 버린 모양이다.



사라토가(Saratoga)에서는 호숫가 주변에 캠핑장 하나가 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로스(Ross)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다리가 아파 쉬겠다는 로스를 남겨두고 호숫가로 다가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에서 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엄밀히 말하자면 목욕 겸 빨래를 하는 셈이다. 여자 아이 세 명이 이미 몸을 담근 채 깔깔거리고 있었다.



"여기 물 깊니?"
"약간요."



머리를 바깥으로 내놓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다이빙. 그 직후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던 것. 재빨리 허우적거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선착장을 이루는 나무기둥 하나가 1미터 앞에 있었다. 짧지만 아득한 거리. 팔을 크게 휘둘러 기둥을 부여잡고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못된 기집애들.'



낮은 수영실력보다 애꿎은 애들을 탓하며 물에서 걸어 나왔다. 조금 전의 아우성은 사라지고 호숫가는 그저 잔잔했다. 서풍의 신 제퓌로스(Zephyros)가 산들바람을 보내주니 운치마저 감돌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불청객은 어디나 있다. 모기떼들이 극성이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무리가 로스와 나에게 덤벼들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우리는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조금만 틈을 줘도 피부에 내려앉는 그들 덕에 나는 밥그릇을 든 채 돌아다녔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본능적으로 춤에 재능이 있는 이유를 아시는가? 말라리아 모기를 피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흔들어 댔던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그들을 춤꾼으로 만들어냈다.



"내일 봐!"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로스는 텐트를 급히 열어젖혔다. 그리고 몸을 안으로 던져 넣었다. 빈틈없는 속도에 치를 떨며 나도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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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사라토가 호수의 일몰 ⓒ 최성규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나는 텐트 속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사라토가 호수 건너편에 자리잡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 위로 걸터앉은 구름 덩어리가 심상치 않았다. 갑작스럽게 작렬하는 번갯불. 소리 없이 명멸하는 빛의 깜박임이 구름 곳곳에서 일어났다. 자연이 선사하는 불꽃놀이였다. 산불주의보 덕분에 보지 못한 콜로라도의 독립기념일 불꽃을 와이오밍이 대신 보여주는 셈이다. 모기와 추위가 침낭 속으로 닥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서서히 잠이 든다.
#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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