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직후 중화민국 주재 미국대사가 백선엽 대사를 만나 대화한 내용을 본국에 보고한 '비밀전문'의 첫 장
재미 안치용 씨 제공
5·16 쿠데타 직후 미국은 친미성향의 장면 정부를 무너뜨린 박정희 소장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소장은 군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낼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이에 미국 정부는 재외공관에 5·16 쿠데타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이 누구인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드럼라이트 미국대사가 백선엽을 만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백선엽은 박정희의 군 선배여서 박정희를 잘 알고 있는 인물로 알려졌던 것 같다.
두 사람 중에서 나이는 백선엽(1920년생)이 박정희보다 세 살 아래이나 경력 면에서 둘은 공통점이 아주 많았다. 우선 두 사람은 모두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다. 평남 강서 출신인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경북 구미출신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있다가 군에 입문한 것도 똑같다. 백선엽은 만주 봉천(현 심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 9기로, 박정희는 신경(현 장춘)에 있던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입교했다.
백선엽의 '봉천 9기'는 박정희의 1기 선배인 '신경 1기'와 같은 셈인데, 나이가 적은 백선엽이 박정희보다 군관학교 입교가 빠른 데는 이유가 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기간'을 다 마치고 입교한 반면 백선엽은 의무복무 도중에 입교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총독부에서 이를 문제 삼자 그때 백선엽을 도와준 사람은 만주 군의학교 출신의 군의장교 원용덕이었다. 원용덕은 이승만 정권 시절 '정치군인 제1호'로 불린 사람이다.
백-박 두 사람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박정희는 본과 2년은 일본 육사를 다님) 둘 다 만주군에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8단에서 단장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백선엽은 자무쓰(佳木斯)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당시 두 사람의 계급은 모두 만주군 육군 중위였는데, 이때의 경력으로 두 사람은 모두 '친일군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한국군에서도 출발은 백선엽이 빨랐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 설립된 군사영어학교(군영) 1기생으로 입교한 백선엽은 이듬해 2월 26일에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육군 부위(중위)가 되었다. 반면 박정희는 일제 패망 후 북경으로 나와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몸담았다가 1946년 5월 귀국했다.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한 박정희는 그 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생으로 입교하여 단기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박정희가 한국군 소위로 임관할 무렵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5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만한 인연이 없었으며, 백선엽은 박정희의 군 선배이자 상급자였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극적인 조우'를 하게 된 것은 1948년 10월 발생한 '여순사건'이 계기였다. 당시 군부 내 좌익분자 척결을 위한 숙군(肅軍)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당시 숙군 최고 책임자인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다. 당시 좌익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박정희가 어느 날 백선엽을 찾아와 선처를 호소했다. 백선엽의 회고록 <군과 나>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