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2월 19일 일본에서 처형된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후의 모습. 올 대선일은 윤 의사의 순국 80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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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윤 의사의 시신은 인근 공동묘지에 암매장되었다가 해방 후 백범이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 3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대선이 치러진 지난 19일은 윤 의사 순국 80주기였다. 거사에 앞서 윤 의사는 고향에 두고 온 두 아들 앞으로 편지 한 장을 남겼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대선 후 윤 의사의 이름이 다시 거론된 것은 지난 24일 인수위 첫 인사 때 수석대변인으로 임명된 윤창중씨 때문이었다. 평소 막말과 과도한 언사로 논란을 빚어온 윤씨는 대선 이틀 뒤인 지난 21일 종편 <채널A>의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인수위 참여 가능성을 묻자 "그런 말은 제 영혼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요 윤봉길 의사 보고 이제 독립됐으니까 문화관광부 장관하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라며 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그런데 윤씨는 불과 3일만에 말을 바꾸고는 인수위 수석대변인 자리를 수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다시 윤 의사를 거론했다. 그는 자신의 인수위 참여를 두고 "윤봉길 의사가 제 문중의 할아버지인데 '만약 윤봉길 의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첫 번째 인선 제안을 받았다면 과연 거절했을까' 생각해 봤는데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역시 애국심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고, 저 또한 그런 (애국심의) 판단으로 (수석대변인 제안에) 응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윤창중씨는 파평 윤씨인 것은 맞지만, 윤 의사의 직계 후손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파평 윤씨가 전국에 120만 명이 있는데 우리는 윤 의사 형제의 자제분들(4촌)까지를 유족으로 보고 있다"며 윤씨가 윤 의사의 유족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 관계자는 또 "윤창중씨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윤 의사가 모셔져 있는 효창공원에 와서 참배를 하거나 윤 의사의 순국, 의거행사 등에 애정을 갖고 참석한 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며 윤씨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결국 윤창중 수석대변인은 '문중의 할아버지'인 윤봉길 의사에 대해 평소 별다른 추모의 마음도 갖지 않다가 자신의 궁색한 처지를 변명하기 위해 애국선열로 명망이 있는 윤 의사의 이름을 끌어다 썼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이를 두고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윤봉길 의사는, 어느 개인의 것도 아니고, 문중의 것도 아니고, 온 겨레가 가슴 속에 소중히 모신 민족혼입니다. 자신의 입지를 변명하기 위해 동원될 분이 아닙니다"라며 윤창중씨의 처사를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