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의 총성이 사과밭에서 울리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28) # 8. 탈출(2) ②

등록 2013.08.15 14:28수정 2013.08.1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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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으로 마을이 불타고 있다(원주, 1951. 1. 24.). ⓒ NARA


즉결 처형

그새 트럭은 과수원 바깥으로 빠져나간 듯, 차체는 보이지 않은 채 시동소리만 들렸다. 준기와 순희는 포승줄에 묶인 채 뚜벅뚜벅 과수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뒤따르던 장 상사가 과수원 한가운데쯤 이르자 발걸음을 멈춘 채 권총을 겨누며 고함쳤다.


"동무들, 거기서 십 보 앞으로 가!"

준기와 순희는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갔다. 아마도 그들끼리 저승에서 다시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인 모양이었다.

"이 바보 같은 쌍노무간나들, 도망을 갔으문 전투가 끝날 때까지 깊은 산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곰터럼 숨어 지낼 것이디 뒈지려구 환장했디. 어디메서 빨빨거리다 요기로 잽혀 와? 병신새끼들!"
"……."
"김 동무는 오른 편 사과나무에 머리를 박구, 최 동무는 거기서 왼쪽 사과나무에다 머리를 박으라야!"
"……."

두 사람은 장 상사의 지시대로 과수원 한가운데 좌우 두 사과나무에 각기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내레 열을 센 뒤 총을 쏠 거야. 동무들, 죽기 던에 할 말 있어?"
"없습니다."
"없습네다."
"돟아,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이거디. 알가서. 두 동무 다 독종이군. 기럼 내레 너들을 곳당 처티하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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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투기가 인민군 보급품을 실은 열차를 공격하고 있다(함남 마산리, 1951.) ⓒ NARA


권총 발사

장 상사는 그 자리서 선 채 권총 총구를 준기와 순희 등으로 겨냥했다.


"하나, 둘, 셋…열!"

그는 열을 세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두 방의 총알이 준기와 순희의 등 뒤로 한 발 한 발 잇달아 발사됐다. 순간 준기와 순희는 격발소리에 지레 겁먹고 그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장 상사는 쓰러진 그들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 뚜벅뚜벅 트럭으로 돌아가 앞자리에 탔다.

"승냥이 같은 미제 쌕쌕이들이 저 동무들 냄새를 맡은 것 같아 내레 미리 처티해 버렛디. 부대루 데리구 가봐야 오히려 골티만 아프디."

장 상사는 운전병에게 묻지도 않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야, 날래 가자."
"알가습네다."

운전병은 가속패달을 마구 밟았다. 트럭은 고약한 디젤유 냄새와 검푸른 연기를 남긴 채 과수원을 벗어나 낙동강 쪽으로 사라졌다.

총 맞은 데는 없수?

트럭 엔진소리도 잦아지고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도 두 사람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준기는 자기 몸을 이곳저곳 추슬러 봤다. 그런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준기는 일어나 네댓 발자국 옆에 쓰러진 순희에게 다가갔다.

"순희 누이!"
"……."

순희가 꿈틀거렸다.

"어데 총 맞은 데는 없수?"

순희도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온몸을 살폈다.

"아무 이상 없네요. 동생은?"
"나두 일없습네다."
"그래요?"

순희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곰곰 생각해 보니 장 상사님이 우리를 살려줬나 봅니다."
"아마두 기런 모양입네다."

두 사람은 살아났다는 감격에 포승줄로 묶인 채 서로 몸을 부볐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 사람 심디가 매우 깊디요. 왜정시대 중국에서 조선의용대 활동을 했다고 하더만요."
"언젠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지난 8월 16일 대폭격 때 내가 장 상사님 왼쪽 귓바퀴를 꿰매드렸지요."
"기랬구만요. 아무튼 사람은 돟은 일을 많이 해야가시오. 덕선(적선)지가는 경사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구만요."

금오산

순희가 먼저 이빨로 준기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준기는 손으로 순희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갑세다."
"어디로요?"
"우리가 디금(지금) 이대루 서울로 가는 것은 무리디. 장 상사 말대로 우선 낙동강전투가 끝날 때까지 깊은 산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다는(자는) 곰터럼 숨어 삽세다. 이즈막에는 서울로 가는 길마다 인민군이나 보안대원들이 쫙 깔려 있을 거야요."
"그럼, 어디로 가지요."

"더기(저기) 데 산으로 갑시다. 요기서 보니까 산 모양이 마치 누워있는 부처상으로 우리를 반겨줄 듯 하우. 하늘은 우리를 또 한 번 살레주엇수(살려주었어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늘 우리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무엇이 무섭겠어요."
"기럿디. 오늘 죽었다고 생각하고 우리 열심히 삽세다."
"네, 그래요."

그들은 과수원을 벗어나 서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금오산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과는 다른 힘찬 발걸음이었다. 구미 광평 들판에서 바라본 저녁놀에 물든 금오산은 영락없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사람은 예사 사람이 아닌 부처나 성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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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금오산 ⓒ 구미시자료사진


"저 산에 가면 우리가 숨을 곳이 있을 것 같네요."
"네로부터 산은 모든 사람을 다 품어준다고 하더만요."

준기와 순희는 금오산을 바라보며 무턱대고 걸었다. 길가에는 이따금 사람의 시체도, 부서진 자동차와 탱크들도 널브러져 있었고, 철모나 탄피들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3차에 걸쳐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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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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