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들의 긴 행렬(1950. 10. 16.).
NARA, 눈빛출판사
준기는 포로신문관이 준 신상명세서를 말없이 받아 교실 바닥에 앉아 빈칸을 다 메웠다. 포로 신문이 끝나자 늦게야 저녁밥이 나왔다. 된장국 한 그릇과 밥 한 공기 그리고 단무지 세 조각이었다. 조악한 꽁보리 잡곡밥이었지만 준기에게는 환장할 만큼 맛있는 밥이었다. 준기가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지 일주일은 더 된 것 같았다. 그 즈음에는 감자나 옥수수 아니면 칡뿌리나 야생 열매·메뚜기·개구리·뱀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그날 잡힌 포로들은 모두 같은 처지라 죄다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국물 한 방울, 밥알 한 알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핥았다.
"오늘이 메칠입네까?""아마 10월 22일 거야요. 어제 삐라를 주워보니까 그새 남조선 국방군들이 벌써 평양에 진주했대요.""발쎄?""그런 모양입네다."팔에 붕대를 감은 한 사내가 말했다. 준기는 더운 국물이 입안에 들어가자 조금 생기가 돌았다. 그날 밤 포로들은 허름한 모포 한 장씩 지급받았다. 준기는 가마니를 깐 교실 바닥에 모포 한 장으로 반은 깔고 반은 덮고 눈을 감았다. 옆자리 윤성오 상등병도 그제야 기운을 좀 차린 듯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조용히 말했다.
"내레 조금 전에 보초의 호위로 뒷간을 가면서 보니까 뒤편 가마니에 덮인 시신이 남 대장 이야요.""네에!""살아남은 우리는 죄인입네다.""기렇구만요."준기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비로소 준기는 그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구운 감자준기가 동피골 동굴에서 남 대장과 윤 상등병과 함께 이틀 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그날은 동피골을 따라 오대산 정상 비로봉에 오른 뒤 거기서 본격적으로 북행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여러 날 날감자만 먹자 입에서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준기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언저리에서 솔잎과 마른 소나무가지, 그리고 마른 싸리가지를 주워 불을 피운 뒤 그 잿물에다가 감자를 구웠다. 그날 아침, 세 사람이 그 구운 감자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구운 감자를 먹으니까 아주 살 것만 같구만. 뱃속에서도 대환영이야. 김 동무 수구햇수다래."남 대장은 흡족한 얼굴로 준기를 칭찬했다.
"긴데 국방군 아새끼들이 이 연기를 보지 않았을지 모르갓구만. 내레 빨치산 시절 왜놈 사냥개 토벌대 아새끼들은 개코요, 솔개 눈깔이엇디. 거 개새끼들은 냄새도 개처럼 잘 맡고, 연기도 귀신 같이 찾아내더라구. 기때 우리 항일동디들이 밥해 먹다가 많이들 희생됐디. 자, 이제 날래 출발하자구.""네."김준기와 윤성오가 막 자리에 일어나 떠날 차비를 마쳤다. 그때 요란한 엠원 총소리와 카빈 총소리와 함께 빗발치는 듯한 총탄이 동굴 언저리에 쏟아졌다.
토벌대의 기습